이 글은 카라드 하트세어의 글이며 실피아 슈피리티스무스가 죽은지 수천년 후에 지어진 글이다.
신참 악령술사 교육용 극비 문서
(악령군의 발달과 역사, 카라드 하트세어 지음)
카라드 하트세어의 모습
이 글은 나, 카라드 하트세어가 우리 악령군에 새로 편입된 악령술사들에게 악령군의 설립 취지와 그 유래, 가르침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친히 집필한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그대들이 익히 알고 있었던 지식과는 사뭇 다른 것들인바, 그대들의 잘못된 지식은 내 가르침을 잘 터득하여 수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패로힐 대륙을 영원한 안식으로 이끌 수 있는 이 악령군에 들어온 것을 환영하며 이 글을 잘 숙지하여 우리의 원대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큰 업적을 세울 수 있길 바란다.
내가 처음 영들의 세계로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열 살 무렵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나는 성 그린우드 성당의 견습 성령사였다. 나의 아버지께서 성당의 성령사 수업이 정신을 갈고 닦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시며 나를 이 성당에 입적 시켜주신 것이다. 성당 안에서 나는 작은 성령과 교류하는 연습을 하거나 큰성당의 이곳 저곳에 있는 램프를 닦거나 다 타버린 양초를 가는 등의 작은 잡일을 하고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날 당시 나는 선대 주교님의 무덤을 참배하기 위해서 다른 사제, 주교님들과 함께 그린우드 성당 뒤편에 있는 돌 무덤을 향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그런 큰 무덤들을 구경하는 나에게 거대한 봉분과 석실들은 경이 그 자체였다. 문제는 목적한 무덤에 도착했을 때 일어났다. 선대 주교님들의 무덤으로 통하는 석실의 문을 열었을 때 거대한 악령의 손길이 나를 이끌고 가던 사제, 주교님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이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제, 신관, 주교, 전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악령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성당 뒷켠에 있는 무덤, 그것도 선대 주교님들이 모셔진 장소에 사악한 악령이 출현하자 사람들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아마도 그 악령은 자신의 원혼을 풀기 위해 악마와 계약이라도 맺었던 건지도 모른다. 지금도 내 눈에는 허둥대던 사람들의 모습이 선하다. 분노, 공포, 혐오, 원한, 원망, 고통, 격정. 온갖 무거운 감정들이 내 머리 속으로 왈칵 밀려들어왔다. 마치 내 속에 또 하나의 나가 생겨나는 느낌이었다.
곁에 있던 몇몇 주교님들이 그 악령에 대항할 만한 성령을 불러냈다. 악령은 성령들의 긴 창에 찔려 점점 형체가 흐려져갔다. 고통에 울부짖는 악령의 소리가 온 사방에 진동했다. 석실의 문을 막고 있는 성령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악령에게 긴 창을 겨눈 채 악령이 석실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 길고 하얀 창으로 악령의 배를 뚫어 버릴 듯한 기세로 하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악령이 흐르는 검은 피 같은 연기가 사방에 튀었다가 햇볕에 사라져 갔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무엇인가 홀린 듯이 그 악령에게 다가갔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 악령은 무덤으로 들어가기 위해 계속 애쓰다가 성령의 창에 찔릴 것이 분명했다. 달려들 듯이 악령에게 다가간 나는 악령을 껴안아 버렸다. 갑작스러운 충격이 온몸에 느껴졌다. 놀라기는 악령 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악령은 공격적인 자세를 풀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의 얘기를... 들어줘...'
그 악령은 자신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뭔가 전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악령에게서 악한 기운이 사라져갔다. 평안함과 휴식, 고요함이 악령을 감쌌다.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당시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악령은 조용히 사라졌다. 모두를 죽일 것 같은 살기도 없어지고 햇살 속으로 천천히 녹아 갔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 몰랐지만 포악한 악령을 조용히 잠재워 소멸시킨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정식 성령사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하트세어라는 나의 이름은 이 당시에 세례명으로 받은 것이다.
성령사라는 직업은 나에게 꼭 맞는 일처럼 보였다. 규칙적인 생활, 성스러운 존재들과 교류. 놀라움과 경이로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나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는지 아니면 신의 은총이 내린 덕분인지 나의 신앙심과 신성 마법 실력은 날로 늘어갔고 아주 젊은 나이에 사제의 칭호까지 받을 수 있었다.나는 사제가 되면서 도서관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도서관은 좋은 곳이었다. 그 속에는 많은 지식들이 잠자고 있었다. 책과 함께 호흡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악령술을 접하게 된 것도 책을 통해서 이다. 물론 최초에는 그런 책들을 직접 접할 수 없었다. 성당의 도서관 중 가장 방대한 지하 도서관 같은 곳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사제들에게조차 도서 열람, 심지어 출입까지도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악령술이라는 것은 고대에 소멸한 마술이다. 위대한 사술사 실피아 슈피리티스무스님이 수천 년 전 세상을 승하하시면서부터 정통 악령술은 대가 끊겼다. 물론 간간히 떠도는 복제 문서들과 구전으로 전해지던 간단한 악령술은 명맥을 유지했지만 위대한 사술사 실피아 슈피리티스무스님이 완성하신 많은 악령술이 알 수 없는 신비의 마술로 베일에 가려져 있던 것이다.
내가 악령술이 담긴 책을 접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어느 날 나는 성당 지하에 있는 큰 도서관을 순찰하다가 한 여인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메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도서관장의 심부름을 하는 그런 여인인 모양이었다. 그 여인은 그 장소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성당의 지하 도서관은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메이라는 여인은 나를 보자 당연히 놀라서 달아났고 그 도중 선반에 놓여 있던 궤짝 몇 개가 떨어져 여인을 덮치고 말았다. 여인은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선반 안에 있던 서적이 밖으로 드러났다. 그 서적들의 내용을 보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던 이유는 우연히 밖으로 나온 서적의 내용을 보고 나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고대 악령술과 고대 흑마술 등 금지된 마술에 관해 체계적으로 기술된 서적들이
지하 도서관 장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는 그 내용을 보아버렸고 그 중 펼쳐진 책장의 내용을 무심코 소리 내어 읽었다.
카라드 하트세어의 앞에 나타난 거대한 악마 사울리안
그러자 내 앞에 거대한 악마가 등장했다. 그 악마는 자신을 사울리안이라고 소개했고 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도 했다. 다른 세계에서 지루한 기다림 끝에 나의 부름을 듣고 메이라는 여인의 몸을 빌어 패로힐 대륙으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순진한 처녀가 악마의 모습으로 바뀌는 데 많은 당혹감을 느꼈다. 결국 그 때는 사울리안과 제대로 된 대화도 없이 그 악마를 물러가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내 앞에 사울리안이 나타나고 내가 악령술의 도서를 접했던 사실은 외부에는 드러나지 않았고 도서관에 외부인이 들어오게 한 책임은 그 당시의 도서관장이 지고 쫓겨났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그 동안의 업적을 인정 받아 성 그린우드 성당 주교의 위치에 올랐다. 주교가 된 나는 지하 도서관의 재정비를 결심했다. 고대의 마술들을 이대로 썩일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의 어릴 때의 체험은 악령들이 위험한 존재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쟝이라는 젊은 사제를 통해서 지하 도서관의 방대한 장서를 정리하도록 시켰는데 몇 년에 걸친 긴 작업 도중,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사울리안을 몇 십년 전 본 이후 나는 그 악마와 한 번도 접촉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울리안을 다시 한 번 봐야 한다는 생각이 틈날 때마다 내 머리 속에서 울렸다.도서관으로 내려간 나는 정리하고 있는 쟝 사제를 물러가도록 하고 예전의 그 책을 찾았다.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사울리안을 다시 불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악마는 나타나자 마자 나를 엿보고 있던 쟝 사제를 죽여 버렸다. 엿보고 있었다고는 해도 내가 아끼던 사제가 죽은 것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순간적으로 이 악마를 믿지 못하게 된 나는 악마를 정화시켜 버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몇 번의 대화를 통해 그 악마가 진정으로 나에게 복종하고 있으며 내가 원하지만 명령할 수 없는 것까지 처리해주는 충실한 심복임을 알게 되었다. 쟝이 죽은 것은 사고로 처리되었고 도서관의 장서 정리 계획은 다른 세 명의 사제에게 맡겨졌다.
그 다음부터 나는 자주 사울리안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물론 죄없는 사제를 희생하는 일은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만남은 좀 더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장서의 정리가 반 정도 진척되어갈 무렵 나는 악령술의 서적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내가 이제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무한한 가능성이 숨어있었다. 갖가지 마술과 죽은 영혼들을 다루는 방법, 지금은 잊혀진 정화법 그리고 저주들, 다양한 생물들을 다루는 방법 등 이제까지는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마법과 마술들이 잠자고 있었다.
하지만 악령술의 진정한 가치는 그런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기술이 적혀있는 책을 발견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뭔가 알 수 없는 흐릿한 울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한 가지 이미지로 응착되어 갔다. 그건 어릴 적 접했던 그 악령과 접촉했던 이미지와 비슷했다. 그 이미지를 떠올리며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낼 수 있었고 그 일들을 진행하기 위해 하나하나 준비해 갔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나는 사울리안을 불러내 리네크로 힐이 한 눈에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 위에 마련된 제단에서 나는 악령술사의 지팡이를 만들어내었다. 그 지팡이는 악령술사의 상징이자 완벽한 악령술을 구사하게 해주는 중요한 매개체였다.나는 곧장 그 지팡이를 사용해서 내가 익혔던 모든 악령술을 하나하나 차례로 시험해 보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일단 성 그린우드 성당의 모든 사제와 성령사, 주교, 신관, 시종들을 죽음의 안식으로 인도한 나는 그들의 껍데기를 이용해서 앞으로 대륙을 평정할 시발점이 될 작은 군대를 일으켰다. 그것은 죽음의 군대이자 안식의 군대, 불멸의 군대이자 사자의 군대였다. 그 군대의 위력은 엄청났다. 단 하룻밤 만에 리네크로 힐의 모든 사람들이 안식의 세계로 들어갔다. 얼마간의 저항도 있었지만 진압이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나의 수하로 쓸 재능 있는 사람 얼마간을 남기고 리네크로 힐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안식을 주었다.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던 그들의 혼이 죽음으로 정화되어 천천히 안식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안식의 모습이 죽음이라는 형태로 찾아왔기 때문에 두려움에 질려 달아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적은 수였다.
이 리네크로 힐의 실험으로 악령술에 관한 나의 추론이 정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악령술은 단순히 산 사람을 언데드 괴물로 만드는 기술이 아니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사람을 제물로 해서 괴물을 만들거나 악마를 불러내는 등의 행위가 보이지만 그건 밖에 보이는 과정일 뿐 안에는 다른 뜻이 숨어있다. 악령술의 진정한 의미는 피시술자의 영혼을 정화해서 시술자에게 통합하는데 있다. 언뜻 보기에는 잔인한 듯 보이는, 산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과정이 실은 그 사람의 영혼을 정화하는 숭고한 의식이었던 것이다.
악령술사에게 통합된 영혼은 진정한 의미의 순수 단일 개체일 뿐만 아니라 그 악령술사 내에 살고 있는 다른 영혼들과도 완전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즉 하나가 아니면서도 하나와 같을 수 있다는 말이다. 피시술자의 육체는 악령술사의 의지, 혹은 악령술사 내에 살고 있는 원주인의 의지에 따라 원격으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해골이 움직인다든지 유령이 돌아다니는 것 같은 무서운 현상은 이런 이유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실체를 알고 나면 두려울 것도 없는 것. 실상은 악령술사와 그 안에 있는 연결된 영혼들의 명령을 받는 인형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그 인형을 어디에 사용하는 가는 전적으로 이들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 올바른 사용법은 단 한 가지, 좀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데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실피아 슈피리티스무스님의 악령술에는 이런 깊은 뜻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 분은 세상의 모든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을 외로움도, 고통도, 근심도 없는 세상에서 하나로 하고자 원하셨던 것이다. 나는 이제 실피아님의 유지를 받들어 그 분이 이루지 못한 '마법에 의한 세상의 정화'를 이루고자 한다.
리네크로 힐의 정화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몇 나라에서 리네크로 힐로 탐사대가 파견되었다. 불행히도 정화의 과정을 두려워해 달아난 몇 사람이 바깥에서 이상한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그린우드 성당의 수석 성령사였던 벨리프 쇼링이 리네크로 힐 이웃에 있는 거대도시국가 고르굴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한 때문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벨리프 쇼링의 개인적인 의지는 높이 평가한다. 그 작은 여성령사는 홀홀 단신으로 메마른 대지인 모스켓 사막을 횡단했다. 이건 굳은 의지나 신앙심이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그 성령사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나의 수하로 삼아 함께 일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탐사대는 내가 잠시 거처로 잡고 있던 성당으로 진입했다. 나는 새로 영입한 악령술사인 큐셀드 군텔리암에게 그들을 맞이 하도록 지시했다. 처음에 그들은 성당을 경비하던 언데드 인형들에게 놀란 모양이었다. 여자의 비명 소리가 안에 있던 나에게까지 들릴 정도였으니. 그들은 모두 열 명이었는데 각자 나름대로 실력자들 같아 보였다. 큐셀드 군텔리암이 그들을 맞이한 방식이 안 좋았던지 열 명은 곧장 나에게 달려왔다. 그들은 모두 내가 리네크로 힐을 유령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모두 나를 적대시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탐사대 조직은 때도 늦었고 실력도 나를 따라올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겨우 열 명이었다. 내 주위에는 많은 언데드 인형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명령하면 그 열 명 모두 무한한 죽음의 안식으로 빠지게 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의 행위가 바깥에서는 적대적으로 비칠 것이라는 그 탐사대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주위 국가에서 합동으로 나를 공격한다면 실피아님의 의지를 실현시키기도 전에 악령군은 무너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나는 그 열 명 각각에게 협상 제안을 하였다. 물론 나의 계획은 숨긴 채. 그들의 의식구조가, 죽음의 안식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나의 이상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각각의 협상 제안은 독립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들 자신의 욕망과도 부합되는 것들이었다.
몇몇은 내 제안에 구미가 당기지만 망설이는 기색이 비쳤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그들이 나의 제안을 거부하기에는 언데드 인형들의 수가 너무 많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내가 가지고 있는 '마법에 의한 세상의 정화'라는 원대한 의지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나의 제안에 모두 굴복하였다. 단 한 명, 쿨구레루 데스모네라는 마법사만이 저항을 하는 듯했지만 그걸 간파한 나는
나의 흑마술 지식을 조금 나누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여 그 여인도 굴복시켰다.열 명의 탐사대는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갔고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 있는 결정권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리네크로 힐을 도시 봉인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협상 제안으로 탐사대에게 요구한 사항이었다. 도시 봉인 기간동안 나는 나의 악령술을 좀 더 위력적으로 가다듬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대륙으로 진출하여 나, 카라드 하트세어와 위대한 사술사 실피아 슈피리티스무스님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리라.
실피아 슈피리티스무스... 이분이야말로 흩어져 있던 악령술을 모아 지금의 마술 체계로 정리하신 분이시다. 패로힐 대륙의 악령술은 오랜 고대에서부터 비롯된 마술이다. 대륙의 인간들이 마법과 마술에 대해 깨우쳐 갈 무렵부터 함께 발전한 악령술이지만 먼 옛날에는 정리가 되지 않은 몇 가지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실피아님은 그 옛날 히스로드교를 만든 창시자 중의 한 분이시다. 이 이야기는 저 오래 전 신화시대에 등장하는 것 인만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못하고 또한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아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볼 수 있다. 히스로드교는 오래 전 신화시대에 창시된 종교의 하나이다. 악령술과 흑마술을 기반으로 하고 대륙의 창조신의 하나인 히스로드를 숭배하는 이 교파는 한 때 패로힐 대륙 전역에 걸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진 엘라타 숭배자들, 또 다른 창조신의 하나인 엘라타의 숭배자들에 의해 히스로드 교파는 거의 괴멸되었고 지금은 이름만 남아 식자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을 뿐이다.
이 히스로드교의 교주는 저주 받은 피의 원류인 쿨구레루 카라노로드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히스로드교의 중추인 악령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신 분이 실피아님 인만큼 실피아님은 실질적으로 히스로드교를 대륙 제일의 집단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신 분이라고 볼 수 있다.그 실피아님... 리네크로 힐 출신의 사술사이신 실피아 슈피리티스무스님이 창조하신 악령술이 드디어 이 땅에 다시 부활했다.
나는 악령을 굳이 미화시키지 않는다. 성령은 성령, 악령은 악령이다. 이 존재들은 세상 사람들이 악령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고 혐오스러워 하는 존재들이지만 그 대부분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악령들의 본질을 알게 되면 누구나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안식의 세계로 들고자 원할 것이다.악령술의 진정한 가치는 그 편안함이다. 영혼의 구원과 진정한 통합. 이 방법을 통해 고통과 번뇌, 시기와 오해, 증오와 고독이 가득한 이 세상을 깨끗이 정화할 수 있다.
악령군에 새로 편입한 악령술사들이여! 이제 우리가 행동해야 할 때이다.세상은 그대들의 재능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대들의 능력과 열정이 진정한 세상의 정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ABD 1249년 6월 22일
악령군의 수장
리네크로 힐 성 그린우드 대성당 주교
사술사 카라드 하트세어
신참 악령술사 교육용 극비 문서
(악령군의 발달과 역사, 카라드 하트세어 지음)
카라드 하트세어의 모습
이 글은 나, 카라드 하트세어가 우리 악령군에 새로 편입된 악령술사들에게 악령군의 설립 취지와 그 유래, 가르침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친히 집필한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그대들이 익히 알고 있었던 지식과는 사뭇 다른 것들인바, 그대들의 잘못된 지식은 내 가르침을 잘 터득하여 수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패로힐 대륙을 영원한 안식으로 이끌 수 있는 이 악령군에 들어온 것을 환영하며 이 글을 잘 숙지하여 우리의 원대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큰 업적을 세울 수 있길 바란다.
내가 처음 영들의 세계로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열 살 무렵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나는 성 그린우드 성당의 견습 성령사였다. 나의 아버지께서 성당의 성령사 수업이 정신을 갈고 닦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시며 나를 이 성당에 입적 시켜주신 것이다. 성당 안에서 나는 작은 성령과 교류하는 연습을 하거나 큰성당의 이곳 저곳에 있는 램프를 닦거나 다 타버린 양초를 가는 등의 작은 잡일을 하고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날 당시 나는 선대 주교님의 무덤을 참배하기 위해서 다른 사제, 주교님들과 함께 그린우드 성당 뒤편에 있는 돌 무덤을 향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그런 큰 무덤들을 구경하는 나에게 거대한 봉분과 석실들은 경이 그 자체였다. 문제는 목적한 무덤에 도착했을 때 일어났다. 선대 주교님들의 무덤으로 통하는 석실의 문을 열었을 때 거대한 악령의 손길이 나를 이끌고 가던 사제, 주교님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이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제, 신관, 주교, 전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악령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성당 뒷켠에 있는 무덤, 그것도 선대 주교님들이 모셔진 장소에 사악한 악령이 출현하자 사람들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아마도 그 악령은 자신의 원혼을 풀기 위해 악마와 계약이라도 맺었던 건지도 모른다. 지금도 내 눈에는 허둥대던 사람들의 모습이 선하다. 분노, 공포, 혐오, 원한, 원망, 고통, 격정. 온갖 무거운 감정들이 내 머리 속으로 왈칵 밀려들어왔다. 마치 내 속에 또 하나의 나가 생겨나는 느낌이었다.
곁에 있던 몇몇 주교님들이 그 악령에 대항할 만한 성령을 불러냈다. 악령은 성령들의 긴 창에 찔려 점점 형체가 흐려져갔다. 고통에 울부짖는 악령의 소리가 온 사방에 진동했다. 석실의 문을 막고 있는 성령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악령에게 긴 창을 겨눈 채 악령이 석실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 길고 하얀 창으로 악령의 배를 뚫어 버릴 듯한 기세로 하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악령이 흐르는 검은 피 같은 연기가 사방에 튀었다가 햇볕에 사라져 갔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무엇인가 홀린 듯이 그 악령에게 다가갔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 악령은 무덤으로 들어가기 위해 계속 애쓰다가 성령의 창에 찔릴 것이 분명했다. 달려들 듯이 악령에게 다가간 나는 악령을 껴안아 버렸다. 갑작스러운 충격이 온몸에 느껴졌다. 놀라기는 악령 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악령은 공격적인 자세를 풀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의 얘기를... 들어줘...'
그 악령은 자신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뭔가 전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악령에게서 악한 기운이 사라져갔다. 평안함과 휴식, 고요함이 악령을 감쌌다.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당시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악령은 조용히 사라졌다. 모두를 죽일 것 같은 살기도 없어지고 햇살 속으로 천천히 녹아 갔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 몰랐지만 포악한 악령을 조용히 잠재워 소멸시킨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정식 성령사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하트세어라는 나의 이름은 이 당시에 세례명으로 받은 것이다.
성령사라는 직업은 나에게 꼭 맞는 일처럼 보였다. 규칙적인 생활, 성스러운 존재들과 교류. 놀라움과 경이로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나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는지 아니면 신의 은총이 내린 덕분인지 나의 신앙심과 신성 마법 실력은 날로 늘어갔고 아주 젊은 나이에 사제의 칭호까지 받을 수 있었다.나는 사제가 되면서 도서관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도서관은 좋은 곳이었다. 그 속에는 많은 지식들이 잠자고 있었다. 책과 함께 호흡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악령술을 접하게 된 것도 책을 통해서 이다. 물론 최초에는 그런 책들을 직접 접할 수 없었다. 성당의 도서관 중 가장 방대한 지하 도서관 같은 곳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사제들에게조차 도서 열람, 심지어 출입까지도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악령술이라는 것은 고대에 소멸한 마술이다. 위대한 사술사 실피아 슈피리티스무스님이 수천 년 전 세상을 승하하시면서부터 정통 악령술은 대가 끊겼다. 물론 간간히 떠도는 복제 문서들과 구전으로 전해지던 간단한 악령술은 명맥을 유지했지만 위대한 사술사 실피아 슈피리티스무스님이 완성하신 많은 악령술이 알 수 없는 신비의 마술로 베일에 가려져 있던 것이다.
내가 악령술이 담긴 책을 접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어느 날 나는 성당 지하에 있는 큰 도서관을 순찰하다가 한 여인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메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도서관장의 심부름을 하는 그런 여인인 모양이었다. 그 여인은 그 장소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성당의 지하 도서관은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메이라는 여인은 나를 보자 당연히 놀라서 달아났고 그 도중 선반에 놓여 있던 궤짝 몇 개가 떨어져 여인을 덮치고 말았다. 여인은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선반 안에 있던 서적이 밖으로 드러났다. 그 서적들의 내용을 보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던 이유는 우연히 밖으로 나온 서적의 내용을 보고 나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고대 악령술과 고대 흑마술 등 금지된 마술에 관해 체계적으로 기술된 서적들이
지하 도서관 장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는 그 내용을 보아버렸고 그 중 펼쳐진 책장의 내용을 무심코 소리 내어 읽었다.
카라드 하트세어의 앞에 나타난 거대한 악마 사울리안
그러자 내 앞에 거대한 악마가 등장했다. 그 악마는 자신을 사울리안이라고 소개했고 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도 했다. 다른 세계에서 지루한 기다림 끝에 나의 부름을 듣고 메이라는 여인의 몸을 빌어 패로힐 대륙으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순진한 처녀가 악마의 모습으로 바뀌는 데 많은 당혹감을 느꼈다. 결국 그 때는 사울리안과 제대로 된 대화도 없이 그 악마를 물러가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내 앞에 사울리안이 나타나고 내가 악령술의 도서를 접했던 사실은 외부에는 드러나지 않았고 도서관에 외부인이 들어오게 한 책임은 그 당시의 도서관장이 지고 쫓겨났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그 동안의 업적을 인정 받아 성 그린우드 성당 주교의 위치에 올랐다. 주교가 된 나는 지하 도서관의 재정비를 결심했다. 고대의 마술들을 이대로 썩일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의 어릴 때의 체험은 악령들이 위험한 존재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쟝이라는 젊은 사제를 통해서 지하 도서관의 방대한 장서를 정리하도록 시켰는데 몇 년에 걸친 긴 작업 도중,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사울리안을 몇 십년 전 본 이후 나는 그 악마와 한 번도 접촉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울리안을 다시 한 번 봐야 한다는 생각이 틈날 때마다 내 머리 속에서 울렸다.도서관으로 내려간 나는 정리하고 있는 쟝 사제를 물러가도록 하고 예전의 그 책을 찾았다.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사울리안을 다시 불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악마는 나타나자 마자 나를 엿보고 있던 쟝 사제를 죽여 버렸다. 엿보고 있었다고는 해도 내가 아끼던 사제가 죽은 것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순간적으로 이 악마를 믿지 못하게 된 나는 악마를 정화시켜 버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몇 번의 대화를 통해 그 악마가 진정으로 나에게 복종하고 있으며 내가 원하지만 명령할 수 없는 것까지 처리해주는 충실한 심복임을 알게 되었다. 쟝이 죽은 것은 사고로 처리되었고 도서관의 장서 정리 계획은 다른 세 명의 사제에게 맡겨졌다.
그 다음부터 나는 자주 사울리안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물론 죄없는 사제를 희생하는 일은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만남은 좀 더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장서의 정리가 반 정도 진척되어갈 무렵 나는 악령술의 서적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내가 이제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무한한 가능성이 숨어있었다. 갖가지 마술과 죽은 영혼들을 다루는 방법, 지금은 잊혀진 정화법 그리고 저주들, 다양한 생물들을 다루는 방법 등 이제까지는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마법과 마술들이 잠자고 있었다.
하지만 악령술의 진정한 가치는 그런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기술이 적혀있는 책을 발견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뭔가 알 수 없는 흐릿한 울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한 가지 이미지로 응착되어 갔다. 그건 어릴 적 접했던 그 악령과 접촉했던 이미지와 비슷했다. 그 이미지를 떠올리며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낼 수 있었고 그 일들을 진행하기 위해 하나하나 준비해 갔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나는 사울리안을 불러내 리네크로 힐이 한 눈에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 위에 마련된 제단에서 나는 악령술사의 지팡이를 만들어내었다. 그 지팡이는 악령술사의 상징이자 완벽한 악령술을 구사하게 해주는 중요한 매개체였다.나는 곧장 그 지팡이를 사용해서 내가 익혔던 모든 악령술을 하나하나 차례로 시험해 보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일단 성 그린우드 성당의 모든 사제와 성령사, 주교, 신관, 시종들을 죽음의 안식으로 인도한 나는 그들의 껍데기를 이용해서 앞으로 대륙을 평정할 시발점이 될 작은 군대를 일으켰다. 그것은 죽음의 군대이자 안식의 군대, 불멸의 군대이자 사자의 군대였다. 그 군대의 위력은 엄청났다. 단 하룻밤 만에 리네크로 힐의 모든 사람들이 안식의 세계로 들어갔다. 얼마간의 저항도 있었지만 진압이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나의 수하로 쓸 재능 있는 사람 얼마간을 남기고 리네크로 힐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안식을 주었다.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던 그들의 혼이 죽음으로 정화되어 천천히 안식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안식의 모습이 죽음이라는 형태로 찾아왔기 때문에 두려움에 질려 달아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적은 수였다.
이 리네크로 힐의 실험으로 악령술에 관한 나의 추론이 정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악령술은 단순히 산 사람을 언데드 괴물로 만드는 기술이 아니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사람을 제물로 해서 괴물을 만들거나 악마를 불러내는 등의 행위가 보이지만 그건 밖에 보이는 과정일 뿐 안에는 다른 뜻이 숨어있다. 악령술의 진정한 의미는 피시술자의 영혼을 정화해서 시술자에게 통합하는데 있다. 언뜻 보기에는 잔인한 듯 보이는, 산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과정이 실은 그 사람의 영혼을 정화하는 숭고한 의식이었던 것이다.
악령술사에게 통합된 영혼은 진정한 의미의 순수 단일 개체일 뿐만 아니라 그 악령술사 내에 살고 있는 다른 영혼들과도 완전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즉 하나가 아니면서도 하나와 같을 수 있다는 말이다. 피시술자의 육체는 악령술사의 의지, 혹은 악령술사 내에 살고 있는 원주인의 의지에 따라 원격으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해골이 움직인다든지 유령이 돌아다니는 것 같은 무서운 현상은 이런 이유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실체를 알고 나면 두려울 것도 없는 것. 실상은 악령술사와 그 안에 있는 연결된 영혼들의 명령을 받는 인형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그 인형을 어디에 사용하는 가는 전적으로 이들의 의지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 올바른 사용법은 단 한 가지, 좀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데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실피아 슈피리티스무스님의 악령술에는 이런 깊은 뜻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 분은 세상의 모든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을 외로움도, 고통도, 근심도 없는 세상에서 하나로 하고자 원하셨던 것이다. 나는 이제 실피아님의 유지를 받들어 그 분이 이루지 못한 '마법에 의한 세상의 정화'를 이루고자 한다.
리네크로 힐의 정화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몇 나라에서 리네크로 힐로 탐사대가 파견되었다. 불행히도 정화의 과정을 두려워해 달아난 몇 사람이 바깥에서 이상한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그린우드 성당의 수석 성령사였던 벨리프 쇼링이 리네크로 힐 이웃에 있는 거대도시국가 고르굴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한 때문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벨리프 쇼링의 개인적인 의지는 높이 평가한다. 그 작은 여성령사는 홀홀 단신으로 메마른 대지인 모스켓 사막을 횡단했다. 이건 굳은 의지나 신앙심이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그 성령사를 다시 볼 수 있다면 나의 수하로 삼아 함께 일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탐사대는 내가 잠시 거처로 잡고 있던 성당으로 진입했다. 나는 새로 영입한 악령술사인 큐셀드 군텔리암에게 그들을 맞이 하도록 지시했다. 처음에 그들은 성당을 경비하던 언데드 인형들에게 놀란 모양이었다. 여자의 비명 소리가 안에 있던 나에게까지 들릴 정도였으니. 그들은 모두 열 명이었는데 각자 나름대로 실력자들 같아 보였다. 큐셀드 군텔리암이 그들을 맞이한 방식이 안 좋았던지 열 명은 곧장 나에게 달려왔다. 그들은 모두 내가 리네크로 힐을 유령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모두 나를 적대시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탐사대 조직은 때도 늦었고 실력도 나를 따라올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겨우 열 명이었다. 내 주위에는 많은 언데드 인형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명령하면 그 열 명 모두 무한한 죽음의 안식으로 빠지게 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의 행위가 바깥에서는 적대적으로 비칠 것이라는 그 탐사대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주위 국가에서 합동으로 나를 공격한다면 실피아님의 의지를 실현시키기도 전에 악령군은 무너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나는 그 열 명 각각에게 협상 제안을 하였다. 물론 나의 계획은 숨긴 채. 그들의 의식구조가, 죽음의 안식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나의 이상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각각의 협상 제안은 독립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들 자신의 욕망과도 부합되는 것들이었다.
몇몇은 내 제안에 구미가 당기지만 망설이는 기색이 비쳤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그들이 나의 제안을 거부하기에는 언데드 인형들의 수가 너무 많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내가 가지고 있는 '마법에 의한 세상의 정화'라는 원대한 의지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나의 제안에 모두 굴복하였다. 단 한 명, 쿨구레루 데스모네라는 마법사만이 저항을 하는 듯했지만 그걸 간파한 나는
나의 흑마술 지식을 조금 나누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여 그 여인도 굴복시켰다.열 명의 탐사대는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갔고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 있는 결정권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리네크로 힐을 도시 봉인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협상 제안으로 탐사대에게 요구한 사항이었다. 도시 봉인 기간동안 나는 나의 악령술을 좀 더 위력적으로 가다듬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대륙으로 진출하여 나, 카라드 하트세어와 위대한 사술사 실피아 슈피리티스무스님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리라.
실피아 슈피리티스무스... 이분이야말로 흩어져 있던 악령술을 모아 지금의 마술 체계로 정리하신 분이시다. 패로힐 대륙의 악령술은 오랜 고대에서부터 비롯된 마술이다. 대륙의 인간들이 마법과 마술에 대해 깨우쳐 갈 무렵부터 함께 발전한 악령술이지만 먼 옛날에는 정리가 되지 않은 몇 가지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실피아님은 그 옛날 히스로드교를 만든 창시자 중의 한 분이시다. 이 이야기는 저 오래 전 신화시대에 등장하는 것 인만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못하고 또한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아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볼 수 있다. 히스로드교는 오래 전 신화시대에 창시된 종교의 하나이다. 악령술과 흑마술을 기반으로 하고 대륙의 창조신의 하나인 히스로드를 숭배하는 이 교파는 한 때 패로힐 대륙 전역에 걸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진 엘라타 숭배자들, 또 다른 창조신의 하나인 엘라타의 숭배자들에 의해 히스로드 교파는 거의 괴멸되었고 지금은 이름만 남아 식자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을 뿐이다.
이 히스로드교의 교주는 저주 받은 피의 원류인 쿨구레루 카라노로드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히스로드교의 중추인 악령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신 분이 실피아님 인만큼 실피아님은 실질적으로 히스로드교를 대륙 제일의 집단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신 분이라고 볼 수 있다.그 실피아님... 리네크로 힐 출신의 사술사이신 실피아 슈피리티스무스님이 창조하신 악령술이 드디어 이 땅에 다시 부활했다.
나는 악령을 굳이 미화시키지 않는다. 성령은 성령, 악령은 악령이다. 이 존재들은 세상 사람들이 악령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고 혐오스러워 하는 존재들이지만 그 대부분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악령들의 본질을 알게 되면 누구나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안식의 세계로 들고자 원할 것이다.악령술의 진정한 가치는 그 편안함이다. 영혼의 구원과 진정한 통합. 이 방법을 통해 고통과 번뇌, 시기와 오해, 증오와 고독이 가득한 이 세상을 깨끗이 정화할 수 있다.
악령군에 새로 편입한 악령술사들이여! 이제 우리가 행동해야 할 때이다.세상은 그대들의 재능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대들의 능력과 열정이 진정한 세상의 정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ABD 1249년 6월 22일
악령군의 수장
리네크로 힐 성 그린우드 대성당 주교
사술사 카라드 하트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