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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구레루 데스모네의 일기  

데스모네의 부하인 그리하스가 본 것을 발췌하여 기록




그리하스의 모습


내가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어떻게 쿨구레루님의 방에 들어가 그분의 일기를 훔쳐볼 생각을 했단 말인가? 결국 무사히 나오긴 했지만 내가 그 글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인지도 모른다. 기억력 마술을 동원하여 급히 볼 수 있었던 것 몇 가지만을 여기 적고 있는 이 순간에도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는다. 혹시 내가 일기를 본 것을 쿨구레루님이 알아차리시지 않을까?

그렇다면 진노하신 그 분은 내 앞에 그 사실을 추궁하실 것이다. 아니 어쩌면 추궁 정도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이 문서를 빼앗기고 뇌부터 시작해 몸을 송두리째 녹여버릴지도 모른다. 아아... 쿨구레루님의 손으로 내 뇌가 녹아 버린다면...


아... 아니다. 지금 이런 생각은 그만두자. 기억력 마술의 효능이 떨어지기 전에 내가 본 모든 것들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 내 우상이던 쿨구레루님의 일기! 그 분의 과거 몇 년 간의 생활을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내가 쿨구레루님의 일기에 걸린 마법 봉인을 풀고 내용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반은 내 동료 판그림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 녀석의 정보가 없었다면 일개 흑마술 견습생인 내가 어떻게 대마술사 쿨구레루님의 봉인을 풀 수 있었겠는가?



내가 퍼플 문 타워 꼭대기에 있는 쿨구레루님의 방에 들어갔던 때는 새벽녘이었다. 수요일... 내 동료 판그림이 일러준 대로 역시 방문은 열려있었다. 왜 매달 두번째 수요일 새벽에는 방문을 열어두는 것일까? 알 수 없지. 나 같은 속물이 쿨구레루님의 깊은 속을 어찌 알겠는가? 암튼 세 시간 내에 볼 일을 마치고 방을 나가야 했다. 안 그러면 잠긴 방 안에서 쿨구레루님이 들어오시는 걸 벌레 씹은 얼굴로 맞아야 할 테니.



쿨구레루님의 일기는 두툼한 가죽표지로 장정된 책이었다. 안의 종이 가장자리 부분에는 붉은 황금 칠이 발라져 있었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일기가 쭉 이어져 써있을 것이다. 20년이 넘는 생이 쭉 이어져 한 권의 책에 기록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몸에 뭔가 부드러운 깃털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가죽표지는 최근에 다시 만든 것인 듯 반짝였고 깨끗했다. 앞 표지 중앙에는 흑마술파의 문장, 쿨구레루 가문의 문장이 찍혀있었다. 책을 펼치는 부분은 세 군데에 걸쳐 가죽 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가죽 끈의 끝에서 쇠로 만든 고리가 번쩍였다.



문제는 어떻게 그 가죽 끈 끝의 쇠고리를 풀고 일기장을 펼쳐보느냐는 것이었다. 내 동료 판그림의 말에 의하면 쿨구레루님 일기장의 그 쇠고리는 마법에 의해 잠겨있어서 다른 사람이 주문도 없이 열려고 했다간 당장에 큰 경보가 울려 모든 것이 들통난다고 했다. 나는 세 군데의 쇠고리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얹고 판그림이 일러준 주문을 외웠다. 쇠고리가 뜨겁게 달궈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절그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얹은 쇠고리가 벗겨졌다.



성공!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일기장을 펼쳐 보았다. 안의 종이는 굉장히 얇았다. 20년 넘는 생의 기록이 한 권의 책에 기록되려면 종이도 얇아야겠지. 쿨구레루님의 글씨가 내 눈에 흡착되듯 들어왔다. 글씨는 정말 매혹적이었다. 나 같은 인간은 흉내도 못 낼 필체였다. 유려하고 유연한 필체. 여자의 글씨에서는 보기 어려운 힘찬 필체. 아니. 필체를 감상할 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기억력 향상의 주문을 외우면서 쿨구레루님의 일기를 쭉 훑어갔다. 다음의 내용은 그 주요한 내용들을 몇 개 옮겨 적은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전부를 옮기진 못하지만 언젠가는 전문을 적고 말 것이다. 쿨구레루님의 아름다운 필체를 여기 그대로 복사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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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년 2월 27일 맑음

오늘도 하스프 선생님께 마법 수업을 받았다. 야외 수업이었다.

선생님께서 "봄 날씨가 좋아서 이런 날은 '풀을 빨리 자라게 하는 마법'을 연습하기 좋겠구나." 하셨다. 그리고 '풀을 빨리 자라게 하는 마법' 시범을 보여주셨다. 선생님 발 밑에 있던 잔디가 빨리빨리 자라더니 선생님 발등을 덮을 정도까지 올라왔다.

나도 따라 해 보았다. 신기하게도 나도 됐다! 풀이 막 자라더니 내 발과 선생님의 발을 덮었다. 선생님이 많이 칭찬해 주셨다. 기분 좋았다.

하스프 선생님은 뭐든지 가르쳐 주셔서 좋다.



1236년 5월 3일 맑은 후 흐림

날씨가 더웠다.

오늘은 학교에서 이상한 얘기를 들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한참 내 짝 피링글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내 옆을 지나가던 어떤 애가 나를 보고 저주 받은 피를 가진 계집애라고 하는 것이었다. 저주 받은 계집애는 위험하니 마법 같은 건 배우지도, 쓰지도 못하게 봉인해서 산골에다 처박아 놓아야 한다나 뭐라나... 저주 받은 피가 뭔지는 몰라도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산골에다 처박아 놓다니.

날씨도 더운데 너무 화가 나서 그 애를 붙잡고 막 따졌다. 갑자기 그 애가 소리를 지르며 이상한 행동을 했다. 그 애 친구인 것 같은 애들도 함께 나를 공격했다. 그래서 나도 사방으로 매직 미사일 마법을 쏴댔다. 그리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쓰러졌던 것 같다. 기억 나는 것은 내가 초록색의 매직 미사일 구체에 둘러싸여 있던 것, 아이들의 웅성거림과 비명, 누군가의 고함소리...

정신이 들고 보니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 곁에는 하스프 선생님과 라미레스 원장님이 계셨다. 하스프 선생님께는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부터 마법수업을 받았지만... 계속 신세만 지고 있어 죄송스럽다.

비록 엄마, 아빠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한 채 혼자 자랐지만 막돼먹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정말...

내가 깨어나자 원장님은 나가셨고 선생님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저주 받은 피가 뭐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냥 쉬라고만 하셨다. 마법을 너무 과다하게 사용해서 내부에 있는 마법의 힘이 폭주할 뻔했으니 조심하라는 말씀과 함께 나가셨다.

저녁은 따뜻한 스프와 롤빵. 차가왔던 몸이 따뜻해졌다.



1237년 10월 27일 흐린 후 갬, 추워짐

아침에 일어나서 아카데미로 등교하다. 별 일은 없었다. 본격적인 겨울이 됐는지 춥다.

역사 시간에 저주 받은 피라는 것에 대해 듣다. 그러고 보니 일년 반 전쯤에 어떤 애가 나한테 저주 받은 피를 가졌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 저주 받은 피라는 호칭은 너무 웃긴다. 그러니까 좀 근거도 없고 막 만든 말 같다.

천 몇 백년 전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우리가 사는 이 패로힐 대륙을 마법으로 쑥밭을 만들어 버렸단다. 그래서 그 사람의 후손을 저주 받은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단순히 선조의 잘못을 후손에게까지 뒤집어 씌우다니. 어떻게 그런 게 역사책에까지 버젓이 나와 있을까?

자기들 얘기로는 그 마법사가 자신의 피에까지 강력한 주문을 걸어서 그 큰 힘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게 했다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 후손이 꼭 나쁜 짓을 하라는 법도 없쟎아. 혹시 그 사람을 무서워해서 다른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추방 시키려고 꾸며낸 얘기는 아닐까?

근데 왜 내가 저주 받은 피라는 거지? 그 마법사도 성이 쿨구레루였나?



1242년 1월 30일

마법사가 되기 위한 시험과 시련도 거의 끝나간다. 3년 동안 잠도 거의 자지 못하고 쌓은 수련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돌이켜 보면 정말 엄청난 시간들이었다. 이번에 나와 함께 마법사 수련을 시작한 사람은 40명 정도. 모두 25세에서 35세에 이르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시험까지 볼 수 있었던 사람은 나를 포함해 단 3명. 게다가 아직 장로들의 동의가 남아 있다. 정말 마법사가 되는 건 어려운 일 같다.

내 전공은 불의 마법과 공간 마법. 뭐 불에 마법에 관한 건 고르굴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자신이 있지만 뚜껑은 열어봐야 알겠지? 게다가 저주 받은 성이라는 모함도 있으니. 참내... 세상은 실력만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 것 같다.



1242년 6월 15일

내 생애 최고의 날!! 드디어 마법사 칭호를 받았다!

화염과 프로미넌스, 개폐와 해지의 마법사 쿨구레루 데스모네! 푸풋.

나에게 저주 받은 피를 가진 아이라며 경멸하던 인간들 보라구! 내가 드디어 마법사 칭호를 땄단 말이야! 너희들은 서른이 넘어도 얻지 못할 것은 나는 열 여덟이라는 나이에 얻었다구!

마법사 칭호 수여식은 멋있었다. 불꽃놀이랑 폭죽들... 중앙광장에 모여 모두 우리에게 찬사를 보냈다. 오벨리스크 아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오랜만에 마음껏 재주를 부려 불꽃들을 쏘아올렸다. 불꽃놀이 화약보다도 더 큰 나의 화염 마법이 하늘을 휘젓고 다니는 걸 보니 상쾌해졌다.



1243년 9월 8일

오랜만에 일기를 쭉 훑어 보았다. 그리고 확실히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한다!!!

요 며칠간 있었던 소동으로 머리가 혼란스럽다. 튀는 행동은 자제하자... 조금만 흥분하면 과장된 표현을 하는 나도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 왜 사람들은 '쿨구레루'라는 성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벌써 천 년도 더 지난 사람이 가졌던 성을 우연히 내가 가졌을 뿐인데 왜 나를 두려워하는 걸까?

아마 하스프 스승님이 안 계셨다면 나는 벌써 고르굴에서 추방당했을지도 모른다. 하긴 내 어머니, 아버지도 추방 당하셨다는데 내가 남은 것만 해도 신기한 일이다.

아... 도대체 뭘 하며 살아야 하나. 뭘 하려고 해도 사방에서 방해만 해대니... 스승님만 안계시면 산으로 들어가서 칩거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 동안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그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으니...

일기를 쓰고 있는데 스승님이 잠시 들어오셨다. 뒤는 내가 봐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마법 수련을 계속하라고 하신다. 조금 마음이 안정된다.



1244년 11월 12일

연구실을 받았다. 그것도 퍼플 문 타워의 최상층에!

드디어 내가 인정을 받은 건가? 대충격/대마법/대소환 방어 실드, 안쪽에 따로 마련된 멋진 연구실이 네 개, 적암 산맥이 한 눈에 보이는 큼직한 창문, 게다가 바깥에는 응접세트까지! 이건 최고의 연구실이다.

어쩌면 하스프 스승님께서 힘을 좀 쓰셨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나를 무서워하고 경멸하던 인간들이 나를 이렇게 좋은 연구실로 보내는 것을 그리 반기진 않았을 테지. 그걸 극복하고 이렇게 최고의 연구실에 오게 된 것이다!

이젠 방도 퍼플 문 타워 가까운 곳에 깨끗한 걸 새로 얻어야겠다. 지금 있는 곳은 너무 좁아서 책 둘 곳도 모자라는 판이니. 좀 여자 방 같이 꾸며놓고 살아야지.



1245년 9월 12일

집이 생겼다. 퍼플 문 타워의 마법사라는 게 수입도 괜찮은, 꽤 괜찮은 자리 같다. 연구실이 생긴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벌써 작은 집을 얻게 되다니. 여기저기 자질구레한 일을 한 덕도 있지만. 이제는 금전적으로도 좀 여유가 생겼으니 쓸 데 없는 일은 그만두고 연구에 전념해야겠다.



1245년 12월 8일

새로운 연구 주제를 정했다. 봉인 마법. 개폐와 해지의 마법사라는 칭호에 걸맞게 좀 큰 규모의 마법을 준비해 봐야겠다. 기왕이면 도시 봉인 같은 거대한 것도 좋고... 하지만 그런 큰 마법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을까? 흠... 모스켓 사막 같은 곳에 가서 시험해 봐야 하나? 하지만 장로회에서 엄청나게 반대를 할 텐데... 얼마 전에도 작은 실험을 위해 시간 봉인 마법을 신청했다가 거의 삼개월 만에 허가가 나지 않았던가? 쯥... 늙은이들...



1249년 4월 5일


쿨구레루 데스모네의 모습


변함없는 하루. 오늘은 사막에서 이상한 파동이 강해져서 그 쪽으로 나가보다.

내 예감이 맞았다. 사제 차림의 여자를 한 명 발견했다. 보아하니 리네크로 힐의 사제 같은데... 내가 알고 있는 리네크로 힐의 사제 복장하고 약간 다르긴 했지만... 사막에서 고생을 한 듯 옷은 엉망이었다. 물론 몸은 말할 것도 없고... 심한 탈수증상에 일사병, 피부는 다 트고 암튼 최악이었다.

일단 응급처치를 한 후 집으로 데려와 잘 씻겨서 침대에 눕히고 옷은 깨끗한 걸로 갈아 입혔다. 입고 있던 누더기는 사제복 같아서 버리진 못하고 세탁을 부탁했다.


누구일까... 얼굴을 봐서는 열 아홉 정도 되어 보이는데...

요즘 남쪽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상한 파동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연일 사람의 비명 같은 파동이 커졌다 사그러들었다 하는 것 같은데... 뭔가 큰일이 생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리네크로 힐이라면 그 이상한 파동이 발생하는 남쪽에 있는 큰 나라가 아닌가. 게다가 성 그린우드 성당이라는 큰 성당도 있고.

일단 조치를 취한 후 라미레스 원장에게 갔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내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은 라미레스 원장이나 하스프 스승님 밖에 없는 것 같다. 이래서야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말해봤자 허튼 소리하지 말라는 얘기만 들을 테니... 하지만 일단은 원장님에게라도 말을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1249년 4월 25일

회의 십일일째. 역시 벨리프 쇼링과 함께 집을 나섰다.

사막에서 발견한지 스무 날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벨리프 성령사는 벌써 건강을 회복한 것 같다. 몸이 튼튼한 것인지 성령의 가호가 회복을 빠르게 한 것인지 몰라도 대단하다.

회의는 여전히 프로미테레 아카데미에서 진행되었다. 회의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창문도 없이 푸르죽죽한 돌로 갇힌 공간에서만 회의를 해대는 노인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회의장은 예외 없이 북적거렸다. 팔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십일일 동안 지겨워 하지도 않고 꼬박꼬박 참석하다니 대단하다. 그 속에서 나오는 의견은 맨 똑같은 것들이지만.

회의는 여전히 수박 겉핥기였다. 벨리프의 말을 듣고 있으면 지금 당장 구조대를 파견해도 늦을 것 같은데 여전히 이렇게들 앉아서 회의만 하고 있다니. 그렇다고 구조대 인원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회의장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전부 한 가닥씩 한다는 사람들이니 이 사람들만 가도 충분할 것 같은데...

너무 늦는 것 아닐까? 내일 정도면 결론이 나올 것도 같은데... 하긴 일주일 안에 끝날 것 같은 회의를 열흘 넘게 끄는 걸 보면 한 달이 가도 안 끝날 것 같기도 하고...

오는 길에 벨리프 성령사와 아카데미 옆에 있는 쌍둥이 건물 일루미르 동관에 들어가서 저녁을 함께 했다. 일루미르 꼭대기에 있는 망루에서 하는 식사는 언제해도 일품이다. 중앙광장과 퍼플 문 타워, 중앙의 오벨리스크, 적암 산맥이 한 눈에 들어온다. 벨리프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기뻐하는 벨리프의 모습을 보니 더욱 걱정이 되었다. 벨리프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 앞이라 일부러 명랑하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고향이 유령 도시가 되고 동료, 가족들이 그 안에 있는데... 어찌 편하겠는가? 게다가 기껏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사막을 건너와 구조를 요청했더니 그 얘길 들은 사람들은 탁자 앞에서 쓸데없이 많이 모여 회의만 해대고 있으니...

집에서 자려다가 잠이 안 와서 연구실서 자다.





1249년 4월 26일

실망이다. 이런 결과가 나오다니...

결국 회의는 오늘 끝났다. 탐사대 열한 명을 보내는 것만 합의한 채.

마싱가나 : 스카르 루스피

민스트 : 글렌 주드

파나진 : 피렌디아 림플라이

프레이드 : 스툼추 젝틀러

아리에니르 : 앵글러

소들린 : 지마 데콘

자우버라케 : 라스필

모스켓 : 스텔피론 사이라

화뫼 : 칸 시물라한

도로스카 : 마리오 파치

이렇게 열 명에 나, 고르굴의 쿨구레루 데스모네 열한 명. 그리고 리네크로 힐의 벨리프 쇼링은 참관인 자격으로 가기로 했다.

분명 저 리스트는 최정예 멤버긴 하지만... 인원을 전부 합해도 열 두 명이라니 너무 적다. 말 그대로 탐사대 아닌가? 벨리프 성령사의 말을 들으면 대부대를 파견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뭘 조사하러 가라는 것인지... 아... 뭔가 일이 꼬일 것만 같다.



1249년 5월 15일

이렇게 될 것은 처음 탐사대를 조직했을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지만 막상 탐사 결과가 이렇게 나오고 보니 정말 힘 빠진다.

탐사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또 회의의 연속이다. 이번에는 벨리프 성령사를 빼놓고... 또한 리네크로 힐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민스트의 마법기사 글렌 주드도 빼놓고... 다들 다른 속셈을 가지고 딴 생각들만 하고 있다. 다들 리네크로 힐을 막아놓고 한 몫 잡아보겠다는 속셈인 것 같다. 아마 이것이 카라드가 바라던 것이었을까?

그 안의 악령술사가 카라드 하트세어였다는 것은 벨리프에겐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긴... 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것인가?

카라드가 각 나라들에게 건 제안도 황당하지만 더 황당한 것은 카라드의 생각이다. 다른 탐사대원들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내 눈은 못 속인다. 카라드가 품고 있던 생각, '마법에 의한 세상의 정화'라는 계획은 정말 황당무계한 계획이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을 전부 죽여서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뭐? 영혼을 정화해서 완벽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결합한다고? 죽음의 안식? 도대체가 정신병자 같은 소리다.

하지만 나도 그 카라드를 막지 못했다. 왜? 그 사람이 내건 조건이 매력적이라서? 물론 매력적이다. 내가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있는 마법 연구를 끝마치기 위해서는 큰 공간을 봉인하는 실험을 해보아야 한다. 계획을 세운 지 오 년이 다되어 가는 것 같은데 최종 실험을 할 곳이 없어 미적거리고 있지 않은가. 마침 리네크로 힐을 봉인해 달라고 하니... 게다가 잊혀진 고대의 마법 문서들을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은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뭔가가 있다... 그게 뭘까? 그런 미친 강신술사가 하는 말을 듣고 동요하는 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아니면 난 카라드의 압도적인 힘에 제압당한 것일까? 확실히 카라드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 탐사대 열 명이 카라드 혼자와 맞섰던 그 때 우리가 힘을 합했다면 분명히 카라드를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급조된 탐사대에서 그런 조직력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정신이 혼란스럽다. 세기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봉인 마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지식은 엄청날 테지만... 그러면 리네크로 힐은 붕괴된다... 벨리프 쇼링의 고향도...

어려운 얘기야...



1249년 6월 30일

드디어 봉인 마법을 주재하는 날. 오늘은 밤을 새서 마법 의식을 거행해야 할 것이기에 연구실을 나가기 전에 일기를 미리 써놓아야겠다.

봉인 마법은 피곤한 작업이다... 정신통일!

리네크로 힐을 봉인하면 그 안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아... 그때 도시 안으로 들어갔을 때 살아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 정석대로라면 봉인 공간 안의 공기, 물 등의 흐름이 끊어지고 생명력도 외부와 단절되니 아마 전부 죽지 않을까? 식물, 동물들도 모두 죽고 건물들은 빠른 속도로 침식되겠지. 봉인 막과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은 그래도 조금 나을까? 중심부는 아마 먼지 밖에 없는 사막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도시 바깥에서 살던 사람들도 무사하진 못하겠지...

카라드는 자신의 보금자리가 있는 도시를 봉인한 후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는 걸까? 수하들이 전부 괴물은 아니었으니 몇 남은 인간 부하들과 살아가긴 해야 할 텐데... 뭐 성직자였던 인간이니 어떻게든 먹고 살 수는 있겠지... 아니면 탈출이라도 꿈꾸는 것일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의 봉인 마법은 실패가 되는 것이겠지...

고르굴의 장로회와 탐사대에 인원을 파견한 열 나라의 수장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니 열 나라가 아니고 아홉 나라구나. 민스트는 글렌 주드의 자격 상실로 대책위원회에서 빠졌으니... 삼 년 가까이 봉인을 유지하면 악한 마술이나 불쌍한 악령들도 정화되겠지만 그 반동으로 대지는 황폐해지고 아무 쓸모없는 불모지가 될 텐데... 사람도 살지 못하는 땅을 차지해서 자신들의 영토로라도 삼고 싶은 걸까?

모두들 미쳐가고 있는 것 같다. 자기 나라, 자신의 생각만 한 채... 리네크로 힐 중심부는 그렇다고 쳐도 바깥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아... 왜 나는 이런 큰일의 결정을 고리타분한 장로회와 다른 나라의 늙은 왕들에게 맡겨 버렸단 말인가. 막대한 힘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걸까?

라미레스 원장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하스프 스승님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들린다. 이제 나가봐야겠다.

하룻밤 꼬박... 공중에서 지내게 생겼다. 속옷이나 잘 챙기자...



1249년 4월 3일

어젯밤은 유난히 잠이 안 왔다. 요즘 잠을 제대로 잔 날도 없지만. 마법사 수련 때가 생각난다. 한 달씩 각성 주문을 사용해 가며 잠을 자지 않으며 버티던 때가.

유난히 벨리프 쇼링의 모습이 머리에 각인된다. 봉인을 끝낸 새벽에 리네크로 힐을 뒤로하고 글렌 주드와 함께 떠나던 뒷모습. 글렌 주드의 큰 키에 비하면 벨리프의 작은 키가 돋보이는 광경이었다. 그래. 동쪽으로 떠났었지. 떠오르는 태양이 그들 앞에 있었던가...

라미레스 원장이 찾아왔었다. 근황을 묻고 봉인과 정화에 대해서 몇 마디. 다른 나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도 했다. 그래. 라미레스 원장의 말에는 뭔가 다른 것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 하다. 결국 그 늙은 왕들과 장로회, 의원들이 리네크로 힐을 통째로 먹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역시 그 거래는 수락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시를 정화하기 위한 봉인이라니...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음모? 욕망? 가면 쓴 숫양들 같으니라구...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벨리프와... 그 장로들과... 늙은 왕들과... 카라드와 충분히 교류할 수 있었다면, 이들의 의도를 처음부터 알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래. 인간들의 의식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면... 오해도 없어지겠지.

대화의 단절... 연락의 부재... 항상 문제였다.

내가 마법사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안 날부터. 외부의 사람들은 나와 단절을 원했지. 내가 두려워서 였을까?



1250년 4월 4일

하하! 이건 무슨 일인가!

지마 데콘! 소들린의 무사! 허영심과 교만 덩어리의 황금 무사!

그 개살구 금붙이가 나에게 도전을 했다! 하하! 그래, 그 무사가 아니라 세상 전체가 나에게 도전을 하는 것 같다. 고르굴의 장로회! 소들린 왕실! 마싱가나 프리메이슨! 파나진 통신사 협회! 아리에니르 상인 조합! 자우버라케 연금술사 연합! 모스켓 길드! 그래 다 덤벼라!! 하하!

지마 데콘이 찾아와 그 더러운 이빨을 드러내며 고르굴 장로회와 소들린 왕실의 뒷거래를 이야기 했다. 리네크로 힐을 독차지 하겠다고? 내가 협력하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밀어 버린다고? 그래서 다 없애버렸다! 나의 연구실. 육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해온 연구실도 함께 없애버렸다! 삼천년 가까이 내려온 문화 유산, 퍼플 문 타워도 없애버렸다! 그 안의 사람들, 지마 데콘, 마법사, 연금술사, 정령사들도 함께 없애버렸다!

나에게 칼을 들이대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전부 없애버리겠어!

고르굴 전부, 패로힐 전부를!

아니, 아니지... 너무 흥분하면 안 된다. 침착하게... 그냥 모두 없애면 내가 너무 악당 같지 않은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먼저 아닌가?

그래. 모든 사람의 의식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를 만드는 거야. 그러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하나... 내 힘을 먼저 보여줄까나... 레인보우 타워, 약속의 타워를 부활시켜?

그리고 거울... 나의 선조가 원했던 갈라타델 미러를 손에 넣자.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상징이 무엇인지. 힘의 원천을 찾아 헤매던 선조가 그토록 갈구했던 그 거울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쩌면 빛의 섬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예전에 마법사 수업할 때 가 둘 걸 그랬어...



1250년 4월 18일

레인보우 타워가 부활하고 있다. 호호... 정말 통쾌하다. 허둥대는 장로들의 모습은 정말 볼만했다. 멍청한 것들은 저 탑들이 실제로 부활했다고 생각하겠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끌어올린 환상뿐인 것들인데. 접근할 용기도 없을 테니 확인하지도 않을 테고. 하긴 과거에 탑들이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테니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장로회 인간들... 곧 모두 없애주마... 나에게 적대심을 품지 않았던 사람은 하스프 스승뿐이었다. 하스프 스승의 호의도 결국 나의 보모들을 죽음이나 다름없는 불모의 대지로 추방한 걸 주도한데 대한 죄책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전부 없애주지. 이 세상을 위해서도 그 편이 좋을 것이다.

전부 재편하는 것이다. 이 썩은 세상. 세상을 재편하려면 장로회 같은 늙은이들은 너무 걸리적거린다. 무능력한 늙은이들. 내게 그럴듯한 지위를 씌워놓고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남에게 이용당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그런 늙은이들은 전부 배제한 후 누구도 속일 수 없고 누구도 속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주마.



1250년 5월 5일

고르굴을 박살 내었다. 프로미테레 아카데미를 부수고 그 자리에 레드 선 타워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내게 저항하는 세력들을 전부 없애버렸다.

이제 시작이다.

내 속에 있는 피가 깨어나고 있다. 저주 받은 피가 아닌 선택 받은 피가. 지성과 통제의 피가 아닌 광기와 음모의 피가...

이제 시작이다. 하나씩 착실히... 주문을 읊어나가듯이... 조용하고 은밀하게 처리해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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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음에 내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써 보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시간이 나는 대로 모든 것들을 정리해서 옮겨 적어 놓아야겠다. 하지만 그 작업은 조용한 곳에서 은밀히 진행해야 할 것 같다.

한 글자도 가감 없이 그대로 옮기긴 했지만 혹 어딘가 틀린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 기억력 마법의 효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쿨구레루님이시니 만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뭔가 대책을 세워 놓으셨을지도 모른다. 혹 누군가 자신의 일기를 볼 것에 대비해서 그것을 본 사람의 기억을 흐트려버리는 주문이라든지 뭐 그런 것 말이다. 실제로 내가 전문을 한꺼번에 쓰지 못한 것은 시간이 없어서 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기억이 조금 흐려져서 정확하게 기억해내기 힘든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20년에 걸친 일기를, 아무리 자기 최면 마법을 건 상태라고 해도 한 번에 써내기는 힘들다. 하루에 일 년 치를 쓴다고 해도 20일이 걸린다.

어쩌면 쿨구레루님의 일기를 본 사람은 자신이 본 내용과는 다른 글들이 기억 속에 남도록 조작되었을 수도 있다. 안타깝게 나는 쿨구레루님의 방에 들어갈 때 보호 마법이나 탐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속임수가 있었다고 해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레인보우 타워를 부활시키시고 다 꺼져가던 흑마술파의 명맥에 불을 지피신 위대한 대마술사 쿨구레루 데스모네. 그 분의 일생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던 행운에 감사하며 혹 내가 죽더라도 이 글은 가보로 지정하여 자손대대로 물려 보존할 것임을, 이 글을 보는 나의 후손들에게 명하는 바이다.



-흑마술사 그리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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