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7.23 12:45

식인의 역사?!

https://anizen.com/freeboard/65465 조회 수 734 추천 수 0 댓글 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1

영화 <신장개업>을 보면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아방궁이라는 ‘중국집’은 자장면 맛이 일품이다. 그 원인은? 경쟁업체에서 추적하여 알아보니 인육, 즉 사람고기를 썼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중국집’으로 불리는 중화요리 식당은 음식 맛이 좋을 때 흔히 ‘인육을 쓴다’는 루머가 흘러나오기 일쑤였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인들은 청조 말까지 인육을 시장에서 거래했고, 중화민국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직후까지도 일부 지방에서는 인육을 먹었다!


 


공자도 인육을 즐겨 먹었다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다.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있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 不俱戴天)’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다. 복수할 때는 한 칼에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랐으며 때로는 고기를 잘라먹고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어먹으며 뼈까지 갈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 예로, 측천무후 당시 잔혹한 고문과 형벌로 유명했던 내준신이 처형되었을 때에는, 군중들(그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그의 고기를 잘라먹었다고 한다.


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식인 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주나라 이전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 , 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 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 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 )’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


 


중국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다.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다.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다. 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 = 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갔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단면이다.


 


 


 


뉴기니아 고원 지대의 쿠카쿠카 족


 


 


"저것 좀 봐. 끔찍도 해라. 사람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다니."


"어쩔 수 없어. 비행기 추락 사고로 겨우 살아났는데 인육으로라도 연명을 해야 구조될 거 아냐."


 


식인 행위. 그러나 지구상에는 이처럼 극한 상황이 아님에도 식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의례적 식인 행위인 카니발리즘을 한다.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란 식인이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행위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되어 있거나, 일정한 상황 또는 조건 아래서 식인이 의무 혹은 권리로서 규정되어 있는 경우의 식인 풍습을 말한다. 그 말은 콜럼버스의 보고에 의해, 식인종으로 알려진 카리브 해 섬의 카리브 족(Caribs)에서 유래했다. '카리브'가 에스파니아 인들의 발음 착오로 '카니브'가 되고, 여기에서 '카니발(cannibal:식인자)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식인 풍습은 신대륙 및 오지 원주민들의 야만성과 낮은 문화 수준의 지표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식인 풍습 그 자체만으로 야만성이나 문화 수준의 정도를 논할 수는 없다. 비교적 높은 문화 수준을 가진 종족에게서도 가끔 제례 의식과 관련하여 식인행위가 행해졌다는 보고가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들이 분류한 바에 따르면, 식인에는 식인 대상에 따라 자기가 속한 집단의 구성원을 먹는 족내 식인(族內食人), 타집단의 사람을 잡아먹는 족외 식인(族外食人), 자기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잘라 먹는 자식인(自食人)이 있다. 그리고 식인 행위의 동기를 기준으로 하여 인육의 맛이 좋아서 먹는 식용적(食用的) 식인, 죽은 자의 영력이나 성격 등을 흡수하거나 죽은 자와의 일치.결합을 위해 죽은 자의 인육을 먹는 의례적.주술적 식인, 통상적으로 식인이 금지되고 있지만 식량 부족이나 난치병 치유를 목적으로 인육을 먹는 생존을 위한 식인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류학자들의 분류나 주장이 어떤 것이든 간에 뉴기니아의 고원 지대에 거주하는 포레 족들 사이에 유행했던 쿠루(kuru)병에 관한 의학적 보고와 수많은 고고.인류학적 조사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기근이나 조난 등의 위기적인 극한 상황에서의 식인 행위나 특이한 기호식으로서의 식인과는 구별되는, 관습으로서의 식인 행위가 세계 각지의 많은 사회에서 존재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특히 뉴기니아 고원 지대의 쿠카쿠카 족과 포레 족, 뉴질랜드 내륙 지방의 마오리 족, 수마트라의 바타쿠 족, 서부 및 중앙아프리카 지역과 멜라네시아-폴리네시아 일부 섬들의 원주민, 브라질 오지의 투피남바 족, 멕시코의 아즈텍 인 그리고 북아메리카의 이로코이 족 등과 같은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최근까지도 이러한 식인 풍습이 존재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뉴기니아 고산 지대의 쿠카쿠카 족의 풍습은 특별히 관심을 끈다.


 


뉴기니아는 오스트레일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면적 77만 ㎢의 커다란 섬이다. 적도에 바로 인접해 있기 때문에 기후는 고온다습하다. 해안 저지대는 밀림으로 우거져 있고 경작 가능한 평야가 많이 산재해 있으나 내륙 지방은 고산 지대로서 해발 5000m가 넘는 산도 있다. 뉴기니아 섬은 크게 동반부와 서반부로 나뉘는데 서반부는 네덜란드령으로 1968몀 UN을 통하여 인도네시아로 권리권이 이양되었고, 동반부는 다시 남북으로 구분되어 남쪽 반은 오스트레일리아 직할지이고, 북쪽 반은 오스트레일리아 신탁 통치지로 남아 있다.


 


1906년 처음으로 이 섬의 1/4인 남동부 지역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인도되었을 때 영국 본국과 오랜 불화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는 영령 뉴기니아라는 이름을 없애고 '파푸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오스트레일리아 신탁 통치지인 북동부 지역을 영령 뉴기니아라 하고, 직할지인 남동부 지역을 영령 파푸아라고 한다. 식인종으로 알려진 쿠카쿠카 족의 거주지인 쿠카쿠카 지방은 바로 이 영령 뉴기니아와 영령 파푸아에 걸쳐 있는 고산 지대이다.


 


쿠카쿠카 지방은 폰 만의 뒤편 고산 지대로부터 항만 지구의 행정 소재지인 케레마 뒤쪽까지 뻗쳐 있고, 면적은 약 1만 ㎢ 정도이다. 지도에는 평평하게 그려져 있으나 실제로 평지는 거의 없다. 거주하는 원주민의 수는 약 4~5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쿠카쿠카'라는 이름은 뉴기니아 섬에 야생하는 화식조(火食鳥)를 '코코코코'라고 발음하는 모튜언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쿠카쿠카 족이 튼튼하고 두터운 발끝으로 차는 습성을 지닌 화식조의 다리뼈-가끔 사람의 뼈라고 오인되는-를 무척 좋아한 데서 연유한 듯하다. 쿠카쿠카 족 남자는 반드시 그 뼈를 허리에 차야만 결혼할 여자를 얻을 수 있었다.


 


쿠카쿠카 족의 키는 약 5피트 정도인데 상부 와타트 지방에 사는 사람은 남자도 5피트를 넘는 경우가 별로 없으며 여자는 더욱 작다. 옷은 남녀 모두 갈대 종류의 나무 껍질을 두들겨 만든 것을 걸치고 있어서 이것이 우비와 방한복을 겸한다. 머리털은 대나무칼로 면도를 하고, 목에는 하얀 조개 껍질과 개, 돼지의 이빨을 꿰어 만든 목걸이를 두르고 있으며, 코에 구멍을 뚫어 코걸이를 하고 있다. 일 년에 한번씩 있는 축제일에는 아홉 살된 아이는 남녀 구별없이 모두 뾰족한 새의 뼈로 코를 뚫고 그 구멍이 아물어 붙지 않도록 대나무 가지를 끼워 두었다가 돼지 이빨이나 하얀 뼈다귀로 코걸이를 만들어 단다. 코걸이는 링처럼 둥근 것도 있고 그냥 길쭉한 것도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코걸이를 펑상시에는 아래로 처지게 달고 있다가 싸움을 하러 나갈 때에는 굽은 쪽을 위로 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코걸이가 그들의 시국(時局)을 알려 주는 표식인 것이다. 그리고 킹마 열매를 씹는 습관이 있어서 입술과 이가 갈색으로 물들어 있는데, 이것은 눈에서 코에 걸쳐 먹줄을 넣은 모습과 함께 더욱 험악한 인상을 풍긴다.


 


쿠카쿠카 족은 보통 두세 집이 한데 모여 살며 집 주위는 외적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하여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집의 모양은 대개 원추형이고 풀이나 대나무 잎으로 지붕을 덮고 있다. 입구는 지면보다 1피트 정도 높게 만들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였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평지가 드물기 때문에 대부분 산비탈을 개간하여 밭을 만드는데 자급 자족에 필요한 최소한의 면적 이상은 개간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이하다. 경작은 끝이 뾰족한 막대기를 사용하며 주로 카우카우(감자의 일종)을 심고 이것을 주식으로 한다.


 


고기는 거의 먹지를 않는데 그 이유는 고기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돼지를 키우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대개 축제나 제사를 지낼 때만 사용하므로 항상 육류가 부족한 상태에 있다. 더욱이 뉴기니아의 자연 환경 조건으로 동물의 종류가 적기 때문에 이구아나, 개구리 등 조그만 동물은 모두 식용이 된다. 그 중에서 화식조는 쿠카쿠카 족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다. 화식조는 식용으로 뿐만 아니라 무기나 기타 도구를 만드는 재료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멜라네시아 대부분의 다른 종족과 마찬가지로 육류에서 얻을 수 있는 단백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므로 쿠카쿠카 족도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던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식인에 의한 단백질 섭취이다.


 


쿠카쿠카 족은 토지가 황폐하여 경작이 잘 안 되면 다시 다른 땅으로 옮겨 가는 원시적인 이동 농업을 하였다. 그런데 토지가 피폐해져 정착이 어려울 경우에는 흔히 다른 종족을 습격하여 궁핍을 해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약 10~12명으로 구성된 일단의 전사들이 먼저 완전 무장을 하고 밤중에 미리 목표한 부락에 잠입하여 집을 포위한 뒤 날이 밝으면 집 속으로 뛰어든다. 대항하는 자들을 방패로 막으면서 모조리 죽이고 약탈한다. 이러한 집단적인 전투 외에도 소규모적으로 밭에서 일하는 다른 종족을 습격하여 납치해 가기도 한다. 부락으로 돌아오면 그들은 포로를 장식품으로 장식한 후 맛있는 음식을 준 뒤 추장이 포로에게 "너를 이틀 후에 잡아먹는다."라고 선언한다. 때가 되면 노인에서 아이에 이르기까지 부락 사람들이 모두 모여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축제를 벌이고는 그 포로를 잡아먹는다. 우선, 도살자가 곤봉으로 포로의 머리를 쳐 쓰러뜨리면 추장이 대나무 칼로 손, 발, 내장을 떼어내고 몸통을 잘게 썰어 뜨거운 돌솥(땅을 판 후 돌을 얹고 그 위에 나뭇잎과 진흙을 덮은 것임.)에 넣어 굽거나 파란 대나무 통에 고기를 넣고 그 통을 불에 얹어 그슬리며 요리를 한다. 특히 랑기말 강가의 쿠카쿠카 족은 포로를 죽인 후 내장을 빼내어 버리고 먹을 수 있는 부분은 하루쯤 매달아 두었다가 불에 머리털을 태우고, 고기도 불에 구워 껍질을 벗기면서 돌 위에서 요리를 한다. 그러면 부락민들이 그 고기를 나무 꽂이로 찍어서 먹는다.


 


쿠카쿠카 족이 사람을 사냥하고 또 그것을 요리하는 데 사용한 도구는 대나무로 만든 활과 칼, 돌도끼, 곤봉 등이다. 특히 대나무는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재료였다. 활을 만들거나 적의 화살을 막는 방책을 만드는 데 주로 이용되었고, 마디가 굵은 대나무는 물통으로, 작은 것은 컵으로 사용되었다. 또 대나무로 만든 칼은 전투, 사냥, 요리 등에 다용도로 쓰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나무가 불을 만드는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쿠카쿠카 족이 사용한 돌도끼는 원시적이어서 강바닥에 있는 돌을 주워 깨거나 사암으로 갈아 날을 세운 뒤 나무 자루에 묶어 사용하는 정도였다. 돌도끼는 무기로서보다는 의식용이나 결혼 예물로 많이 쓰인 듯하며, 오히려 중요한 무기는 돌로 만든 곤봉이었다. 둥근 대리석 덩어리 한쪽에 자루를 낄 구멍을 뚫고 다른 한쪽을 울퉁불퉁하게 만든 곤봉은 특히 살인에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쿠카쿠카 족이 식인을 하게 된 이유는 단지 단백질 부족이 그 유일한 원인은 아닌 듯싶다. 와타트의 산 속을 순찰한 순찰관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의 식인 풍습에는 어떤 의식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이 인육을 요리할 때 직접 손으로 만지지 않고 뾰족한 막대기를 이용하는 것은 상대방의 장점이나 특성(예를 들면 용감성, 영리함 또는 성적 능력이나 생식력과 같은)을 손상시키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 저장한다는 생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종족과는 달리, 다신교적 신화나 전설의 전승이 거의 없는 쿠카쿠카 족이 종교적 미신에 의해 식인을 한다고 믿을 만한 증거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 랑기말 강가에 거주하던 한 귀화한 원주민의 말을 빌면 그들은 종교적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싸움하러 나오는 청년, 장년 남자들의 고기가 특히 맛이 좋기 때문에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식용적 식인의 부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쿠카쿠카 족의 식인 풍습은 부락마다 각기 조금씩 달랐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사람의 머리를 잘라 솥에 담아놓은 사진>


 


남미와 기타 지역의 식인풍습


 


중국의 경우에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식인이 행해졌지만, 그외 지역에서 있었던 식인풍습은 일반적으로 미개사회에서 행해졌다. 남미의 원주민들은 오랜 식인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남미의 여러 원주민 종족들이 행한 식인풍습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장례의 일부로서의 식인이며 이런 경우는 차라리 인간적이다. 오리노코 강 상류의 촌락에 사는 구이아카족들의 매장 식인풍습이 그 좋은 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화장하고 남은 뼈를 조심스럽게 모아 절구에 넣고 간다. 장례식이 거행될 때 친척들은 이 가루를 국과 섞어서 서로 나누고 마신다. 슬프게 한탄하면서. 종족에 따라 죽은 사람의 신체 일부만 태워서 먹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재나 뼈를 먹는 것은 화장의 연장이었고, 일종의 제의였다.


 


둘째로, 인신공희(人身供犧) 의식으로서의 식인풍습이 있다. 이는 죽은 사람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지금부터 200∼300년 전만 해도 멕시코의 아즈텍 왕국에서는 전쟁 포로나 자국의 청년 남녀를 제단에 올려서 묶은 다음 희생자의 가슴을 열어젖히고 심장을 끄집어내었다. 캐나다의 휴런족에게도 포로를 밤새 괴롭힌 후 태양이 떠오르면 죽이는 희생의식이 있었는데 이는 전쟁과 태양의 신을 기쁘게 해 주려는 용도였다. 의식이 끝나면 죽은 포로의 몸을 놓고 인육잔치가 벌어진다.


 


셋째로, 적개심의 고취와 적의 세력 약화를 위한 식인이었다.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식인종’들은 대부분 이런 유형이다. 이런 경우, 흔히 포로들은 죽기 전에 극심한 고문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죽인 포로의 시체를 먹음으로써 적에 대해 증오를 표출하고, 자기 부족에게는 ‘식량’을 제공하게 된다. 이런 경우, 두 번째와 비슷한 인신공희 성격이 가미되기도 한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식인은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기아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이성이 마비되면 언제든 식인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도 기근으로 인해 식인행위가 자행되었던 적이 종종 있었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이 로마군에 의해 몇 달 동안 포위되었다가 성안에서 식량이 떨어졌을 때의 참상을 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양식을 마련하는데 지쳤고, 또 어느 곳에서도 양식을 구할 수 없었다. 굶주림은 창자와 골수에까지 사무쳤고, 분노는 굶주림 그 자체보다 더 격렬하게 타올랐다. 격분과 굶주림 때문에 이성을 잃은 그녀는 아직 품안에 있는 어린 아들을 붙잡고 말했다. ‘불쌍한 아가야! 이 전쟁과 기근과 분쟁의 와중에서 어떻게 너를 보호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로마군에게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굶주림은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며, 암살자들은 굶주림이나 노예제도보다 더 잔인하단다. 그러니 너는 나의 양식이 되고 암살자들에게 보내는 나의 분노가 되며 유대인들의 불행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이야기가 되어다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서 자기 아들을 죽여서 구운 뒤 절반은 자기가 먹고 나머지는 덮어두었다.>


 


이런 일들이 1900년도 더 지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알려진 북한의 참상이 바로 그것이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는 북한에서는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창자는 순대로, 고기는 국밥으로 만들어 판 일가족이 처형당한 사건도 있었다.


 


일부 문화인류학자들은 우리가 일컫는 ‘야만인’들의 식인 풍습을 야만으로 규정하기보다는 그 사회에서 부족한 식량 또는 영양을 섭취하기 위한 필요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약육강식의 짐승 세계처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는 이제 소멸될 때가 되었다. 극한 굶주림의 상황에서 귀여운 자식을 고깃덩어리로 보게 되는 비극도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문제는 ‘야만인’들의 식인풍습이 아니다. 유교문화가 발달한 문명국인 중국에서 수천 년 동안 인육을 먹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복수’라는 개념과 ‘충효’라는 사회 통념 속에 인육을 먹는 일이 용납되어 버린 까닭이다. 비단 중국의 식인풍습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문명인’들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인종, 다른 문화, 다른 종교와 역사에 대해 증오를 표출하며 얼마나 많은 살육을 자행했던가. 이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는 노신의 표현처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세계대전 당시에 어느 식인종 추장이 남겼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참 이상하다. 우리들은 먹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런데 당신들은 먹지도 않으면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는가?”◈


 


 


 


문제점


 


사람의 성장 호르몬 유전자가 삽입된 가축은 빨리 자라고 몸집이 커서 식용으로 경제적이다. 그러나 사람의 유전물질을 가진 동물을 잡아먹는다는 측면에서 색다른 윤리적 문제가 제기된다. 다름아닌 식인(cannibalism)논쟁이다.


 


한쪽에서는 사람 유전자 10만개 중에서 겨우 한개의 유전자가 들어 있기 때문에 식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일소에 부치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리 적은 양일망정 사람 유전자를 먹는 것이므로 식인이나 진배없다고 주장한다.


 


고고학자들은 인류 조상의 식인 여부를 놓고 의견이 맞서 있다. 20세기초에는 우리 조상이 짐승처럼 서로 잡아먹어 단명했다는 이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에는 해골의 상처가 식인의 결과라기보다는 풍화작용, 매장 또는 포식동물의 공격 때문에 생긴 흔적이라는 주장이 지지를 받는다. 그로부터 30여년의 논란 끝에 90년대 후반에는 식인 풍습을 시인하는 쪽으로 학계의 여론이 바뀌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기아 해결, 영양 섭취 또는 통치의 수단으로 사람을 잡아먹었다. 아스테카 왕국에서는 굶주림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식인 풍습이 퍼져 있었다. 16세기에 아스테카 왕국을 정복한 스페인 군대에 따르면 멕시코 계곡에서 매년 1만5000명이 도살됐다. 심장을 도려낸 직후 짐승처럼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극단적인 기아상태가 아닌 상황에서 식인이 이루어진 사례도 많았다. 파푸아인들은 동물성 지방과 단백질을 좋아해서 신생아의 태반은 물론이고 죽은 친척들의 썩은 시체까지 발라먹었다. 호주 동북부 퀸즐랜드의 원주민들은 포로를 잡으면 여자와 어린 아이를 요리해 먹었다. 큰 짐승을 구할 수 없었던 그들로서는 야생동물보다 지방질이 많은 인육을 뿌리칠 수 없었다. 특히 콩팥 부근의 지방질을 귀하게 여겼다. 여자와 어린애는 성인 남자보다 지방질이 풍부해 인기가 높았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인 아나사지는 400년 동안 공포정치를 위해 식인을 일삼았다. 단순한 죽음보다 남에게 먹히는 것을 훨씬 무섭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통치에 활용한 셈이다. 아나사지 마을에서 발견된 800년 전의 뼈다귀 2000여개를 연구한 결과 식인풍습이 확인됐다. 머리를 잘라 구워먹고 뼈를 쪼개서 골수를 파먹은 것으로 결론이 났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행된 식인의 사례도 적지 않다. 1873년 미국 콜로라도 광산에서 금을 캐던 광부가 눈보라로 오두막에 갇히게 되자 동료를 잡아먹고 연명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체포돼 식인혐의로 40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15년만에 석방됐다.


 


1972년 안데스 산맥에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생존자들은 죽은 사람의 살을 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2년 옛 소련에서 73세 노파가 82세 남편의 몸을 절반 가량 먹은 죄로 체포됐다. 그로부터 석달 뒤에 두 명의 우크라이나 죄수가 감방 동료를 잡아먹은 혐의를 받았다.


 


이러한 식인 사건은 서구 언론에 대서특필됐으나 러시아에서는 뉴스거리가 안된다. 스탈린 시대부터 가뭄 동안에 사람의 살을 뜯어먹고 생존했다는 이야기가 러시아에서는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식인습관이 엄연한 사실로 입증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의 유전물질을 가진 가축을 먹는 행위를 식인과 연관시키는 것은 흥미로운 발상인 것 같다.


 


사람 유전자를 가진 식품에 이런 사실을 밝힌 표지를 붙여 고객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 유전자를 동물에 집어넣는 데서 비롯되는 윤리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몇달 전에


41세의 독일 남자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찾아온 이웃 남자를 살해하고 인육을 먹은 사건이 일어나


한동안 떠들썩 했었죠.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지존파 같은 놈들 외에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고려시대의 기록을 보면(삼국시대였나..하여튼 그 비슷한 때)


자기 자식을 잡아먹기가 힘들어서


이웃집 아이와 바꿔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출처 : '인육을 먹은 사람은 누가 있죠?' - 네이버 지식iN)


Comment '5'
  • profile
    아인슈타인 2006.07.23 15:00
     아 이거 본인도 알았던 사실인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주장이 거의 대립하고 있던데
  • ?
    2094aa 2006.07.23 15:16
    인간고기가 가장 맛있다니까 뭐...
  • ?
    샤샤VS냐 2006.07.23 18:55
    흐흠.. 고기는 자기 종족의 고기가 제일 맛있대요...
  • profile
    The。샤샤™ 2006.07.23 22:03
    내용보다 코멘트가.. 더 오싹한것은 왜일까요.....;; 덜덜..
  • ?
    fpdltuf사령관 2006.07.23 23:01
    그런겁니까..??
     
    식귀는 뭐지..-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