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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는 온통 새까만 어둠 뿐이었고,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차갑고 섬뜩한 느낌을 주는 그 바람은 소리도 없이 다가와 마치 살아있는 듯이 고타로우의 몸을 더듬으며 꽉 휘감았다. 고타로우는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궁금해서였지만, 아까부터 바람에 어떤 냄새가 섞여서 불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립지만, 생각하기 싫은....... 피냄새?

"욱!"

고타로우는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오래전부터 잊을 수 없는 냄새였다. 속도 울렁거렸지만, 무엇보다도 머리가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끼-익! 꽝!"

차 소리. 고타로우 앞에 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엄마가 누워 있었다. 피를 흘리며.......

"엄마......."

고타로우는 조그맣게 엄마를 불렀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 광경, 그리고 무덤 앞에서도 눈물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던 그 슬픔....... 그리고 가만히 안고 같이 울던 아빠....... 차와 엄마는 점점 희미해지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머리를 조여오는 그 괴로움은 거세지는 바람과 함께 더 아파왔다.

"하아, 하아."

어디선가 힘든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고타로우 말고 누군가 그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고타로우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가려고 할 때였다.

"휘잉!"

바람이 소리가 나는 쪽에서 불어와 고타로우가 달려가는 것을 강하게 막았다. 그 때문에 고타로우는 잠시 균형을 잃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가지 못할 정도로 세게 부는 것은 아니었다. 한걸음, 한걸음, 그렇게 발걸음을 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얼마쯤 걸어갔을까.......

"꺄악!"

갸냘픈 비명소리가 들려왓다. 매우 힘없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무엇 때문인지 울려서 상당히 크게 들렸다. 낯익은 목소리. 바람은 더 세졌지만, 고타로우의 속도는 더 빨라졌다. 한참 더 걸어가자 멀리서 희미한 형상이 보였다.
흰 빛을 발하는 두 명의 누군가가 고타로우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둘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 졌을 때, 고타로우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세라프와 미샤였다.
미샤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채로 공포에 질려 간신히 도망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세라프가 차가운 무표정으로 따라붙고 있었다. 세라프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안돼!!!"

고타로우가 소리치며 달려가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세라프는 미샤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흰 섬광이 미샤의 등을 갈랐다.

"촤악!"

세라프의 공격이 미샤를 맞추고, 달리던 미샤의 속도가 늦추어지더니 결국에는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쉴세없이 불어오던 바람도 그쳤다. 그때서야 앞에 서 있는 고타로우를 보았는지 미샤의 눈이 커졌다. 천천히 미샤의 손이 고타로우 쪽으로 들어올려졌다.

"고...타......."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힘들게 고타로우를 부르려던 미샤는 미처 다 부르기 전에 힘이 다 한듯 쓰러져 버렸다.

"안녕히......."

세라프는 잔인한 미소를 입에 문 채로 가볍게 뒤돌아섰다. 잠시 멈추었던 바람은 세라프가 눈에서 사라지자 다시 불기 시작했다. 고타로우는 천천히 미샤가 쓰러진 곳으로 갔다. 그리고 미샤를 끌어안고 흔들었다. 깨어날 리가 없었다. 고타로우는 얼굴을 미샤의 품에 파 묻고 울기 시작했다.

"미샤누나....... 미샤누나......."

"괜찮아."

어디선가 들려온 미샤의 목소리. 눈 앞이 갑자기 밝아졌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쉴새 없이 아침임을 알리는 시계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때는 평상시 고타로우르 깨우기 위해 울리는 시간과 비교했을때 울리기 시작한 지 몇 분 지난 후였다. 잠시 동안 멍해 있던 고타로우는 좀 시간이 지나서야 방금 전 일이 악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꿈속에서 느꼈던 공포와 슬픔, 혼란 같은 것들은 여전히 조금 남아 고타로우를 괴롭게 했다. 꿈꾸는 동안 잠꼬대를 했는지 눈가에는 눈물도 촉촉히 맺혀 있었다. 고타로우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후......."

고타로우는 짧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고타로우는 눈가에 남은 물기를 숨기고 계속 울리는 알람시계를 끄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 때, 고타로우는 몸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토끼귀를 가진 잠옷을 입은 누군가 고타로우를 끌어안고 있었다.
설마... 라고는 생각했지만 고타로우는 설마가 사람잡는다 라는 속담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가를 몸으로 직접 느끼게 한 천사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다. 옆에는 미샤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타로우를 안은 채로 자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 걸까... 고타로우는는 천사 라는 말 외에는 형용할 길 없는 그 평화로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우냥, 고타로우....... 넘 좋아."

고타로우가 아직 시계가 계속 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쪼~옥"

갑자기 미샤가 고타로우의 얼굴을 끌어당기더니 고타로우의 입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기습적인 공격. 고타로우의 얼굴이 빨개졌다.

"우~~와~~~ㅅ! 미샤누나!"

옆집에서 밥을 짓던 시아, 신문을 보고 있던 시로, 그리고 책을 읽고 있던 타로 모두 고타로우의 목소리를 듣고 놀랄 만큼, 고타로우는 놀라 크게 소리를 질렀다. 시계소리도 놀랐는지 아까보다 소리가 더 커진 듯 했다. 천천히, 미샤가 눈을 떴다.

"후아. 고타로우, 좋은 아침"

미샤는 이 작은 소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긴 하품을 하고 고타로우에게 아침인사를 했다. 고타로우는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고 나서 미샤를 방 밖으로 밀었다.

"잠깐, 왜 그래 고타로우."

"옷 갈아 입으려고."

짧게 대답한 고타로우는 문을 닫고 잠궈 버렸다. 그리고 여전히 빨간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미샤의 말이 고타로우의 얼굴을 더 빨갛게 만들어 버렸다.

"그럼 나도 고타로우랑 같이 갈아입을래."

"읏, 말도안돼는 소리 하지 마!"

고타로우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부끄러운 감정을 숨기려는 듯 고타로우는 알람시계를 세게 껐다. 어쩜 이렇게 미샤누나는 부끄러움을 모를까....

"우에, 그래두 고타로우랑 떨어져 있기 싫은데....."

"......."

고타로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물론 대답하면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런 미샤가 좋아서 대답하지 못한 게 더 컸다. 일어난 직후 괴로웠던 자신과 지금, 약간 당황스럽기는 했어도 엉뚱한 미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어쩐지 행복하다는 느낌이 절로 나는 지금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비교되면서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도 있었다.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에 고타로우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 뒤에 살짝 어둠이 깔렸다. 그것은 미샤가 걱정되서였다.

"고타로우....... 고타로우?"

밖에서 걱정되는 듯한 미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타로우는 정신을 차리고 길고 긴 옷갈아입기를 서둘러 끝마쳤다. 그리고 방문을 열었다.

"....... 그정도로는....... 죽지 않아."

방문을 열고, 말문이 막힌 듯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 나서 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밖에 마치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미샤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헤, 다행이다."

미샤는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눈을 비볐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타로우에게 달려들어 고타로우를 꽉 껴안았다. 둘 다 넘어졌다.

"웃, 미샤누나."

"아, 미안. 아파?"

"아니, 괜찮아."

말뿐만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아픈 기색도 보이지 않게 고타로우는 상당히 조심했다. 아주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그마한 일에도 쉽게 울어버리는 미샤였으니까........
그렇게 서로 아무 말 없이 넘어진 상태로 있었다. 위에 겹쳐져 있는 미샤를 보면서, 고타로우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미샤누나, 이제 그만 일어나서 가자. 더 늦으면 지각할 수도 있다구."

"응."

한참 후에야 고타로우가 입을 열었도, 둘은 집 뭄을 열고 나갔다. 문을 잠구고 다시 옆집 문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잠깐, 지금 이대로 둘이 같이 들어가 버리면......."

옆집에 들어갈 때가 되서야 고타로우는 생각났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지금 고타로우는 미샤와 한 이불에서 잔 셈이 된 거였다. 타로와 시아, 시로가 뭐라고 생각할 지 뻔한 노릇이었다.

"잠깐......."

문을 열려는 미샤를 고타로우는 잠시라도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미샤는 문을 활짝 열어버리고 말았다.

"다녀왔습니다!!!"

미샤가 웃으면서 큰소리로 말하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고타로우는 멍한 표정이 되어 조그만 미동도 가만히 있었고,그 둘을 타로, 시아 , 시로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둘을 바라보았다.

"에?"

주위가 너무 조용하자 미샤는 이상한 듯이 주위를 둘러 보았다.

"풉! 와하하하......."

드디어, 타로가 들고 있던 책을 놓치며 웃음을 터트려 버리고 말았다. 밥을 준비하고 있던 시아도 조용히 웃었다. 다만, 시로만이 아무렇지도 얺은 듯 웃지 않고 다시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히히히......."

왜 모두들 웃고 있는 건지 알고 있는 걸까... 미샤도 따라 웃었다. 점점 고타로우의 얼굴이 빨개졌다.

"미샤누나는 왜 웃어! 그리고 타로... 형하고 시아누나도 이제 그만 웃어요!"

아직 타로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고타로우는 중간에 잠시 머뭇거리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결과는 결국 역효과, 웃음 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서 있지만 말고 와서 같이 밥먹어요. 준비 다 됐어요."

시아가 식탁에 각자의 밥을 담으며 말하자 고타로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가서 앉았다. 그리고 미샤가 옆에 앉았다. 그 때까지도, 여전히 타로는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뭐 어때, 예비부부 사이인데.......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말 뿐. 그렇게 웃고 있는데 신경쓰지 않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고타로우의 얼굴은 더욱 새빨개졌고, 고개도 더욱 숙여졌다.

"이 팔불출 영감아. 좀 그만 웃어. 니 꼴이 지금 백 살 다 먹은 녀석 꼴이냐?"

"시끄러 냐옹아. 재밌는 건 재밌는 거야. 그리고 아까 그 비명소리 진짜 놀랐다구. 푸하하하......."

전 같으면 또 싸웠겠지만, 오늘은 왠일인지 더 이상 말다툼이 이어지지 않았다. 시로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가볍게 쉬더니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때까지도, 타로는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계속 웃고 있었다.

"하아...... 아, 고타로우. 내가 좀 심했니?"

타로는 겨우 진정이 되어서야 고타로우가 약간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됐어요. 괜찮아요."

약간, 삐진 기운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고타로우는 표정을 얼른 감추고 숟가락을 들었다. 모두들 (물론 시로는 빼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타로우를 보았다. 하지만, 고타로우가 밥을 밥을 한 숟갈 먹고 표정이 다시 밝아지자 안심했다. 시아가 만든 음식은 말 그대로 마술이었다. 소박한 음식임에도, 세상 어느 고급 요리도 따라갈 수 없는 맛을 가지고 있었느니까.......

"응, 응. 역시 시아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어. 그동안 얼마나 먹고 싶었다구."

"고마워요. 미샤씨."

"그럼, 누가 찍은 최고의 마누라 감인데."

"아이, 참 타로씨도......."

"이봐, 최악의 로리타 영감탱이. 그만 까불고 가만히 밥이나 먹어."

잠시, 타로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로... 로.... 이봐, 너......."

"맞잖아. 시아랑 같이 살 때 시아의 외모는 인간으로 치면 초등학생 정도였으니까."

점점, 상황이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는지, 타로는 충격을 받은 채로 아무말 없이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리고 위로해 주는 듯 시아가 등을 두들겨 주었다. 시로의 표정에서 승리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고타로우의 눈에는 , 처음으로 난 결판이었다.

늘어난 가족. 그리고 그리웠던 사람들과 그리웠던 감정들. 따뜻함. 얼마나 어리석었나. 이런 감정을, 나쁘다고 부정해 버린 자신이.......

"고타로우, 요즘 울지 않기도 힘들구만."

간신히 정신을 차린 타로가 고타로우를 보고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타로우는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둘러 고타로우는 표정을 바꾸었다. 그런 고타로우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 타로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오늘 시노가 돌아오는 날이니까 좀 맡아주세요. 원래는 밤 늦게까지 맡아주기는 하지만 오늘은소풍갔다가 돌아오는 날이라 맡아주지 않을 수 도 있거든요. 4시 쯤 되면 도착할 거에요."

고타로우는 화제를 바꾸려는 듯 서둘러 말했다.

"하지만 시노는......."

시아가 걱정되는 듯이 말했다. 시노는 악마의 기운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어서 오래전부터 시아를 많이 무서워했다. 시아 뿐만이 아니라 타로와 시로도 두려워 할 가능성이 컸다.

"음....... 그러면 미샤 누나가......."

"안 돼. 나두 오늘 고타로우 따라서 학교 갈 거거든."

"쨍그랑!"

"켁, 콜록 콜록......."

마치 철없는 아이같이 당연하다는 듯한 미샤의 말을 듣고 모두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들고 있던 밥그릇과 숟가락을 떨어뜨린 사람은 타로였고, 마시던 국이 목에 걸린 듯 연거푸 기침을 하는 사람은 시로였다. 그 외에 고타로우와 시아는 놀라 멍한 표정을 지으며 미샤를 바라보았다.

"카리쑤마 냐옹이군. 오늘은 철저히 이미지 망가져 버렸군."

"시끄러. 다 큰 노인네가 밥그릇 놓친 건 또 뭐냐?(타로는 듣지 않고 밥을 주워 담았고. 시아가 새 밥을 담아다 주었다) 후....... 미샤. 생각이 있기는 한 거냐? 지금 내 상황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 쯤은 너도 알고 있을 거 나냐!"

"맞아, 미샤누나. 괜히 밖으로 나와 버리면......."

"그래요, 미샤씨. 위험할 수도 있다구요."

모두, 미샤를 집에 가둘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제 회의에 참석했던 시로들 뿐만이 아니라, 고타로우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미샤의 기억과 겁에 질려 꼼짝도 못하는 채로 돌아온 시아를 보아, 고타로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천사가 미샤를 노리고 있다는 것 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고타로우는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꿈 속에서 세라프의 공격에 미샤가 쓰러지는 것이 생각났다. 흔들어 보아도 눈을 뜨지 않았던 미샤의 모습도......."

"싫어! 난 고타로우하고 같이 있고 싶단 말야! 얼마나 그리웠는데,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막무가내였다. 모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고타로우가 조용히 그런 미샤에게 다가갔다.

"미샤누나......."

"와락!"

갑자기, 고타로우가 미샤를 껴안았다.

"미안, 미샤누나, 하지만 안돼. 그때 다짐했던 것처럼 서로를 위해 난, 그리고 미샤누난 이제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안돼. 계속 어리광 부리게 되면 더 이상 행복해 질 수 없다구. 그리고, 내가 그렇게 설 수 있는 것은 미샤누나가 옆에 있기 때문이야. 볼 수 없는 것 쯤은 참을 수 있지만 만약 미샤누나가 사라져 버리면, 난 아마 영원히 스스로 일어날 수 없을 거야.
가두려고 해서 정말 미안, 그래도....... 부탁이야."

"훌쩍....... 응"

모두 간신히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운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미안하기만 했다.

"하하....... 그래두 역시 젊은 애들은 좋아. 볼까지 빨개질 정도로 뜨거우니......."

그런 약간 침체된 분위기를 어떻게든 띄워 보려는 듯, 타로가 어색한 웃음을 띄면서 말했다.

"팔푼이."

짧고 간단하게, 시로가 핀잔을 주었다. 쉽게 받아 칠 수 있을 법 했지만, 타로는 그 자리에서 아무말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아까의 충격으로 쉽게 대꾸 할 수 없게 된 듯 했다. 그런 타로를 보니, 고타로우는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그럼, 시노 좀 부탁해."

"응, 다녀와."

웃으면서 대답해 주었지만, 여전히 미샤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감정이 또다시 커졌다.

"잘 갔다가 와."

"안녕히 다녀오세요."

"......."

여전히 아무런 말 없이 배웅하는 시로였지만, 타로와 시아는 그런 고타로우의 마음을 날려 주려는 듯, 활짝 웃으면서 배웅해 주었다.

"응, 다녀올께."

어째서일까, 오늘따라 이렇게 발이 무거운 이유는. 고타로우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그 무언가를 뿌리치기 위해 세차게 다리에 힘을 주며 달렸다. 확실히, 평소보다 힘이 많이 드는 것 같았다. 이유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엘레베이터도 타지 않고 고타로우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벽 사이로 발소리가 울리기 때문인지, 고타로우의 가슴도 따라 울리는 듯 했다. 숨이 차 오를 때 쯤, 그렇게 아파트 입구로 나왔을 때였다.

"고타로우!"

"고타로우!"

아파트 입구를 나오자 마자 보이는 눈 앞의 가을 하늘이 오늘 따라 흐리다고 생각할 때 쯤, 낯익은 목소리가 고타로우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다카시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왜 그렇게 서둘러 뛰어가? 오늘은 같이 못 갈 뻔했네. 후......."

다카시가 말을 마치고 숨을 고르자 고타로우도 약간 찬 숨을 진정시켰다. 집에 남아있고 싶다는 마음을 뿌리치느라 다카시와 고보시가 같이 등교하러 올 거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 자신이 약간 바보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타로우는 잠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 지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기, 그게 말야......."

"고타로우! 다카시!"

고타로우가 머뭇거리면서 말을 할 때 멀리서 고타로우의 말을 막는 소리가 있었다. 고보시가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고보시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멀리서 좁은 보폭으로 허둥지둥 달려오는 게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후아, 오늘은 왠일로 밖에 있는 거야? 혹시 내가 좀 늦은 거야?"

"아니, 괜찮아. 사실 아까 고타로우가 서둘러 뛰어나오길래 방금 전에 붙잡은 거야."

다카시가 웃으며 대답했다. 고타로우는 제 때에 고보시가 와 준게 고마웠다. 다카시에게 말할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 자신의 발목을 붙잡던 그 복잡한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막막하던 참이었다. 어쨌든, 그거와는 관계 없이 고타로우는 둘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실은 말야......."

"응?"

"반가운 사람이 옆집에 이사왔어. 아마 모두 기쁠 거야."

고타로우는 점점 몸이 떨려 왔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다가왔다. 왜일까, 그리 긴장한 상태에서 말할 이유는 없는데.......

"누군데 그래?"

고보시가 무지 궁금한 듯 말을 재촉했다. 고타로우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떨려서인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아 누나랑, 미샤누나야."

일순간에, 모든 것이 멈추었다. 그리고 잠깐 그대로 있더니 흐릿한 하늘이 걷히고 햇빛이 그 사이를 뚫고 나왔다. 주위가 천천히 밝아졌고, 그와 함께 고보시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단 한마디의 감탄사였지만, 그 저절로 터져나온 짧은 한마디는 고보시의 기쁠과 감동을 전해주기에는 충분했다.

"응, 그 외에도 시아 누나 가족들이 여럿 왔어"

"시아누나랑, 미샤누나라......."

다카시는 가만히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고타로우가 이상한 듯 물어보자, 다카시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기 있잖아, 학교 가기 전에 우리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가자. 너무 보고 싶어."

고보시가 말하더니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때, 다카시가 고보시의 옷깃을 잡아 들어가지 못하게 말렸다.

"왜......."

고보시가 뒤돌아보며 물으려고 했지만, 다카시의 심각한 얼굴에말문이 막힌 듯 했다. 무언가 중대한 문제가 있는 듯한 그 굳은 얼굴에 서린 진지함에, 고타로우는 잠깐 다카시가 고보시에게 고백이라도 할 줄 알았다.

"지금은 만나면 안돼, 절대로. 고타로우!"

짧게 말한 다카시는 고타로우쪽으로 돌아서며 불렀다. 고타로우는 순간 움찔했다. 솔직히 지금의 다카시 얼굴은 평상시처럼 편안하게 대하기에는 좀 부담스러웠다. 거기다가 고타로우 쪽으로 다가오기까지 하니, 고타로우의 긴장이 심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 이 앞에 있는 황당한 녀석이 무슨 짓을 할 지 두려워 지기까지 했다. 그것은 고보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진지해져서는 고타로우에게 달려드는 이 녀석의 생각을 도통 짐작 할 수 없었다. 결국, 다카시는 고타로우의 어깨를 잡았다.

"고타로우, 우리 친구지? 친구로써 부탁 하나만 할께. 들어주라."

"뭔.......데?"

고타로우와 고보시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

"너, 오늘 학원 빠져라. 파티하게......."

긴장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니, 춥기까지 했다.
고보시는 힘이 빠져버린 듯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고, 고타로우는 멍한 표정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황당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너....... 아까 심각하게 생각한 게......."

"응, 이거야. 설마 안되는 건 아니겠지? 그럼 그럼, 학원 수업이라는 것 정도로 우리의 우정을 설마 깨버리겠냐? 안그래?

들어주는 것은 힘들지 않았지만, 고보시와 고타로우 모두 할 말을 잃은 채로 그런 다카시를 쳐다보기만 했다. 오랫동안 사귄 친구지만, 정말 속 모를 녀석이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찬 채로.......

"그래도 역시 생각대로 재미있었더. 둘이 긴장해서 굳은 모습이란....... 하하하하하하하........"

"역시 노린 거였냐?!!!!"

둘이 소리쳤을 땐 이미 다카시는 저 멀리쯤 달려가고 잇었다.

"당연하지~~!"

"거기 서!"

고타로우와 고보시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다카시를 쫓았다.

그 때였다.
모두들 어느 정도 멀어지자 별안간 한 천사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 천사의 날개는 섬뜩한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얼굴은 검은색의 문신으로 뒤덮여서, 백조의 날개가 아니라면 도저히 천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무언가에 굶주린 듯한 그 눈은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느끼게 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먹힐 것 같은, 메마른 눈빛이었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날개의 깃털이 조금씩 흔들릴 때면, 마치 무언가의 섬뜩한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후후....... 지금은 평화로워 보이는 군....... 언제까지 그렇게 평화롭게 웃을 수 있을까......."

붉은 빛의 날개를 가진 그 천사는 입맛을 다시더니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그 뒤를 하얀 날개를 가진 두 명의 천사가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나 그 천사를 따라갔다.



"6시에 하자. 기왕이면 히로시하고 카오루도 데리고 와. 맘엔 안들지만......."

"하하하......."

헤어져야 하는 길목에서 다카시가 끝을 흐리며 말하자 고타로우는 웃으면서 알겠다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 각자의 학교로 향했다.



"고타로우! 좋은 아침!"

"고타로우 요즘 얼굴이 더 밝아지는 것 같아. 오늘도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거야?"

학교. 타츠키와 타쿠는 평상시처럼 고타로우를 보자 마자 아침 인사를 하며 달려왔다. 아, 그렇지. 이 두사람도 같이 파티에 초대하면.......

"그냥 좀....... 있잖아. 오늘 어제 말한 사람들을 위해 친구들이랑 같이 파티를 하거든."

"에?"

"우리도 같이 하자."

말하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단다. 고타로우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이봐, 거기! 좀 조용히 해!"

갑자기 시로가 화가 난 듯 소리쳤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런 히로시를 잠시 보더니 막 웃기 시작했다. 물론 타츠키와 타쿠도 따라 웃었다. 다만, 방금 도착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고타로우만이 그저 어리둥절한 상태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 맞다. 고타로우는 모르겠구나."

"우왓! 말하지 마!"

왜 웃는지 모르는 상태로 궁금하다는 듯이 서 있는 고타로우를 보고 타츠키가 말해주려고 하자 히로시가 일어서면서 말리려 했다........ 더 이상의 상황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고타로우는 히로시가 지금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웃는 사람들과 합류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히로시는 여름교복 바지(하복은 남색 반바지)와 비슷하게 생긴 치마를, 그것도 엉덩이 부분이 크게 찢어진 바지를 입고 온 것이었다. 히로시는 아무 말 못하고 다시 얌전히 앉더니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타츠키와 타쿠의 말에 의하면 히로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온르 엄청 피곤한 상태로 학교에 나타난 모양이었다.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고 눈이 빨갛게 충혈된 상태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학교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조금 정신을 차린 후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다고.......

"히로시 도련님!"

밖에서, 검은 양복을 입고 선그라스를 낀 한 남자가 제대로 된 교복을 들고 다급하게 나타났다. 그 남자를 보고 히로시는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다시 엄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죄송합니다. 도련님."

"야, 야. 그만 둬라, 히로시. 안와도 되는 때에 이렇게 널 위해 와 준게 어디냐?"

"맞아. 그쯤하구 빨랑 그 치마나 제대로 갈아입고 와."

히로시가 화를 내자 주위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시끄러!"

크게 소리치기는 했지만, 더 이상 말을 이을 형편이 못됬다. 장난이기는 해도, 단순하게 상황에 안맞는 야유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지 입술이 조금씩 씰룩거리기는 했다.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한 히로시는 교복 바지를 낚아채듯 받더니 탈의실로 갔다. 그 선그라스를 낀 사람이 히로시의 엉덩이를 가리며 따라가자, 교실은 삽시간에 웃음의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뒤에 따라가는 사람도 참 안됐다. 도련님 잘못 만나 같이 웃음을 받아야 하다니....... 그나저나 히로시 집에 저 찢어진 치마는 또 뭐지? 이런 여러가지 잡다한 생각을 하며 고타로우는 히로시를 기다렸고, 무엇 때문인지 옷갈아 입는 것 치고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히로시가 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이제 됬다는 듯이 당당한 표정으로 교실 문을 열었기 때문인지, 또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뭐 했길래 오늘 상태가 그래?"

"....... 트레이닝 난이도를 너무 높여 버렸다. 뭐, 그렇다고 힘들었던 건 아니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히로시는 고타로우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마지막에 아무렇지 않았던 듯한 말은 그냥 무시해 버리고, 무지 고생한 모양이었다.
히로시의 특별한 공부법인 트레이닝은 집안 여기저기에 문제를 내는 기계같은 것을 두고 틀리면 벌칙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작년, 실수로 미샤와 함께 함정에 빠지듯 말려들었던 고타로우는 생고생한 덕택에 그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덤으로 히로시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헤에, 귓속말?"

"둘이 사이가 꽤 좋구나."

"아냐!"

강하게 부정하는 히로시의 모습을 보고 고타로우는 속으로 살짝 웃었다. 서로 말은 안해도 둘이 서로 조금씩 정이 쌓여왔다는 것 쯤은 둘 다 알고 있었다. 히로시에 대해 아직 모르는 점이 많기는 해도 다른 애들에 비하면 고타로우가 훨씬 많이 알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히로시, 할 말이 있어."

"뭔 일이냐?"

"오늘 미샤누나와 시아누나 가족의 환영 파티를 할 거야."

"에? 히로시 초대하면 안되는거 아냐?"

타쿠의 의문이 실린 말. 그건 일단 내버려 두고 고보시와 다카시 때와는 달리 중간을 생략하고 히로시에게 너무 갑자기 말을 했는지 히로시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차, 고타로우는 좀 서둘러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게 말야......."

고타로우가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필요가 없어진 듯 했다. 히로시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기 때문이었다.

"돌아온 거냐?"

"응. 깜짝 파티야. 6시 쯤에 다같이 하기로 했는데 카오루랑 같이 올래?"

고타로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그 후의 히로시의 생각은 히로시의 동작을 보고 읽을 수 있었다. 천사를 본 듯한 감동적이 표정, 눈물을 글썽이며 두 손을 하늘로 펼친 모습과, 다시 인상을 찌뿌리며 주먹을 여기저기 휘두르는 모습이 번갈아 나타났다. 각각 미샤와 시아를 생각한 모습이라는 것 쯤은 당연한 말이었다.

"히로시, 괜찮을까?"

"가서 사고칠 것 같은데."

히로시의 감정 표현이 좀 과격했는지, 타츠키와 타쿠가 걱정되는 눈빛으로 말했다. 둘 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이 히로시를 보는 표정들도 좀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아냐! 그리고 당연히 가야지! 시아는 내버려 두고 미샤씨가 왔는데."

시아는 내버려 두고 가 맘에 안 들기는 했지만, 예전부터 그래온 데다가 시아가 악마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타로우는 굳이 화를 내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 시로와 시아가 히로시 때문에 상당히 긴장했을 법 했다. 시도때도 없이 악령퇴치를 외쳐대며 달려들었으니까. 고타로우는 빙긋 웃었다.

"카오루 데려오는 거 잊으면 안돼"

"날 뭘로 보는 거야! 쓸데없는 걱정 마."

"거기 넷. 자리에 앉거라. 수업 시작했다."

언제 종이 쳤는지, 선생님이 들어왔다. 다시 확인하는 듯 서로 눈으로 살짝 신호를 보낸 후 모두 자리에 앉았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 때, 창문 밖으로 흰 날개가 지나갔다. 하지만 고타로우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 채 책을 폈다.



한편, 학교 수업이 시작할 때 시아네 집에는 약간 침체된 기운이 감돌았다. 고타로우가 떠난 뒤로, 미샤는 먼 하늘을 바라보는 듯 넋을 읽은 표정을 죽 짓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모두들 거의 말을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끔씩 그런 분위기를 깨 볼려고 한두마디 정도 나누기는 했지만, 분위기를 올리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 조용하구만......."

결국 타로가 먼저 솔직한 입을 열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이제껏 주고받은 대화중에서는 지금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제서야 미샤는 집안 분위기를 눈치챈 듯 넋이 나간 표정을 바로 고치고 사과했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런 미샤에게 타로와 시아는 대답 대신에 따라 웃음을 지어주었다.

"학교로....... 가고 싶은 거죠?"

시아가 물어보자 미샤는 머뭇거리며 볼을 긁적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죄송해요. 저희도 이렇게 가두다시피 하고 싶은 건 아닌데......."

"아니야. 나 때문인 걸 뭐......."

미샤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아직은 어색한 분위기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조금 분위기가 밝에 흘러가는 듯이 보였다.

"냐옹아! 너도 좀 껴봐라."

"시끄럽군. 내가 네 의도대로 분위기를 띄울 성 싶으냐?"

"뭐야?"

"악마한테 기대할 걸 기대해라. 넌 아직 한참 멀었다."

"....... 헹, 됬다. 냉혈악마군. 싫으면 관둬. 말리진 않을 거니까."

아까부터 창 밖만 바라보는 시로를 대화에 끌어들여 (안좋은 방법이었지만) 서로 한판 붙으면 조금 더 분위기가 밝아질 거라고 얘상했던 타로였지만, 시로가 무관심한듯 시큰둥하게 말하자 토라진 듯 구석에 돌아서 버렸다. 그런 타로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그렇지만 더 이상의 말싸움이 귀찮다는 듯이 타로는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원체 그런 일에 익숙치 않은 탓도 있었지만, 그럴 맘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 창문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볼 때는 더더욱 무리였다. 시로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창문 밖을 쏘아보았다. 무언가 움찔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그래도, 역시 집 안에서만 있는 것 보다 집 밖에서 무언가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나봐요."

"확실히......."

모두 다시 약간 어두움이 깔렸다. 그런 세사람을 보던 시로는 무언가 결심한 듯 갑자기 일어났다. 모두 시로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가요?"

미샤가 물어보았지만, 시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망토 안쪽을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파란 구슬 같은 것을 꺼내 높이 들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너의 주인으로서 부르노라!"

마력이 실린 탓에 목소리가 울렸다. 모두 순간 움찔했을 때, 파란 빛이 감돌았던 그 구슬이 붉게 빛나더니, 구슬에서 검은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안개같이 흔들리던 그 형체는 점점 뚜렷해졌다.

"후후, 멍청하긴. 결국 내 도움 받게 되 있다고 해도 말 안듣고 똥고집 부리더니만."

"....... 이번 유머는 좀 웃기는군. 똥개."

"야! 너 마견신을 도대체 뭘로 보는 거야?!!"

형체를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뚜렷해지자 마자 시로와 말싸움을 해 대는 그 동물은 개의 모습을 했지만, 등에 악마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탓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런 모두를 느끼고 그 동물(이라고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동물)은 헛기침을 하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모두들 놀라는 게 당연하지. 나같은 녀석들은 악마인 자들도 쉽게 모습을 볼 수가 없거든. 이몸은 귀하고 위대한 마계의 견신 Solide.De.Flume. 능력을 인정받은 자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따르는 악마다. 뭐 보다시피 지금은 저 애송이가 주인이지만. 이름으로 다 부르기는 힘드니 리드라고 불러주면 좋겠군."

말투는 그럴 듯하게 하긴 했지만, 뒤에 꼬리를 흔드는 게 멋있다는 이미지와는 상당히 먼 모습이었다.

"타로같은 녀석 하나 더 부르기 싫었는데......."

"뭐야!"

시로가 한숨을 쉬며 말하자 타로와 리드 둘다 소리쳤다. 그러나 그 외침은 그냥 무시해 버린듯, 갑자기 시로는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잠깐 나가봐야 하니까 리드 넌 여기 좀 지키고 있어봐."

"에? 너 시아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멀리만 안가면 상관 없어. 그리고 절대 밖에 나오면 안돼."

"심심하게 왜?"

리드의 반문에 시로는 아무말 없이 얼굴로 창문 밖을 가리켰다.

"!!!"

모두 그제서야 왜 시로가 아까부터 아무말 없이 창문만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시로의 몸짓은 상당히 위험한 분위기를 충분히 알려 주는 듯 했다.

"훗, 긴장되는 군. 오자마자 스릴이라니."

리드만이 웃으면서 기대되는 눈치일 뿐, 다른 사람들은 상당히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저 멍청한 개가 실력 없는 애송이였으면 부르지도 않았다."

"저게! 야! 거기 안서!"

안심시키려는 듯, 시로가 차분히 말하더니 리드의 말을 무시한 채로 몸이 보이지 않게 하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약간의 두려움은 다 가시지 않았는지, 모두의 표정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에잇, 뭐야! 내가 미덥지 않다는 거야!"

"아니에요, 그런건......."

"젠장, 이런 분위기가 난 제일 싫다구! 좋아, 두고봐! 내가 분위기를 한창 띄워줄 테니까. 야! 거기 남자! 공 같은 것 좀 가져와봐."



한편, 시로는 천사가 보지 못하게 몸을 감춘 상태로 어디론가 날아가는 천사 한 명을 추격했다. 물론, 집 쪽에 감시가 붙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천사 한명이 새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감시하는 건 그 수가 너무 적었다. 그 대신에, 계속해서 다른 천사들이 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건 시로의 눈에 계속 신경쓰였다. 처음 이동을 시작한 시간과 방향으로 보아 틀림없이 고타로우의 학교 쪽, 즉 고타로우에게 날아가는 거였다. 필시 집쪽에 있는 천사는 단순히 움직임을 감시하는 것 뿐인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날 그저 유인하기 위해서인가, 하지만 그렇기에는 아까 한명 쫓아낸 뒤에는 주위에 천사의 기운이 느껴지지......."

시로가 천사의 의도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어느 순간엔가 학교에 도착했다. 순간, 시로는 크게 놀라 움찔했다. 한 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타로우 한명에 10명은 너무 많았다. 절대 놏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나타나는 듯 했다. 시로가 따라간 그 천사는 다른 천사와 대화를 하더니 서로 교대를 한 듯 본래 지키고 있던 천사는 어디론가 날아갔다.

"납치하겠단 건가......."

그 때, 지키고 있던 천사들 중 몇명이 이야기를 나누며 시로 쪽으로 다가왔다. 시로는 들키지 않게 뒤로 물러났지만, 이야기가 들릴 수 있도록 어느정도 거리는 유지했다.

"심심하구만, 언제까지 가만히 지키라는 건지."

"지금 달려드면 간단할 텐데......."

"야, 야. 좀 생각하고 말해. 칸쿄는 밤이 되야지 활동할 수 있다구. 거기다가 오늘은 상황 파악일 뿐이잖아."

칸쿄....... 라고?

들어본 이름이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실력이 좀 있는 천사라는 뜻이었다. 상당히 성가실 듯 했다.

"칸쿄도 불쌍하지. 빌어먹을 악마 때문에 낮에는 나오지 못하다니......."

"맞아. 어쨌든 심심한 건 마찬가지야. 빨랑 나도 교대시간이 왔.......!!!"

순간, 칸쿄라는 이름을 말했던 그 천사가 뒤쪽으로 갑자기 돌아서더니 붉은 화살같은 것을 날렸다. 시로의 몸에서 약간 많이 비껴나갔다. 그제서야 시로는 이야기에 빠져 잣니이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시로는 다시 집쪽으로 날아갔다. 천사들을 상대하기에 힘이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밤에야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일단은 지금은 괜찮다는 뜻이었으니까. 굳이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을 듯 했다.

"무슨 일이야?"

"....... 아니, 신경과민인가......."

다행이,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시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학교에 애완동물은 힘들테고,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이 목적인지는 몰라도, 일단 위험한 게 미샤만이 아니란 것은 확실해졌다. 무언가 손을 써야 했다. 시로가 안 것은 밤에 무언가 실행한다는 것과 일단 오늘은 무사하다는 것 뿐. 시로는 잠시 리드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충분히 실력이 있었지만, 개의 모습을 한 외형은 학교까지 동행하기는 힘들었다. 그 때, 시로의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도, 역시 집 안에서만......."

시아의 말이었다. 시아의 말과 함께 그 표정도 함께 떠올랐다.

"이제 행복하게......."

그와 함께 떠오르는 누군가의 말. 확실히, 위험하다는 것을 핑계로 언제까지고 모두를 집에 가두어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언가 모두를 밖으로 데리고 나올 방법이....... 지원은 아니다. 전에 어떤 악마 때문에 지원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영 내키지 않는다.

"아!"

순간, 시로의 머릿속에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바보같이, 마계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생각이 앞서 그런 간단한 생각도 못하다니....... 하지만, 그건 역시 내키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시로는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마음을 가라앉히는 듯 짧은 한숨을 쉬었다. 상관 없겠지. 시로는 하늘을 보았다. 해가 뜬 위치를 보아 지금 출발하면 시노가 돌아올 시간과 대충 맞을 듯 햇다.

"상관없겠지. 나카토의 도움을 받는 건 아니니....... 신에도 다른 쪽 일을 하고 있고......."

시로는 약간의 머뭇거림을 만드는 고민거리를 털어놓듯 말하더니 속도를 높였다.


"6시에 와야해! 너무 빨리 오지 말고."

"응,"

"히로시 넌 카오루 데려오는 거 잊지마!"

하교시간, 고타로우는 서로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대체 몇번째냐! 암만 맘에 안 드는 동생이라고 해도 내가 빼 놓을 성 싶으냐?"

"응."

"거기다가 이상한 옷도 입고 올 것 같아. 찢어진 치마같은."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그냥 잊어!"

"싫어! 메롱!"

타츠키와 타쿠는 히로시가 영 신용이 안간다는 눈치였다. 무리도 아니었다. 어제 히로시가 알면 안되는 살마들이라고 했던 게 약간은 실수였다. 틀림없이 그걸 아직까지 그대로 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어제 그 이야기를 할 때는 시아네만 있었으니 몰라도 지금은 미샤까지 있으니 히로시가 쉽게 일을 엉망으로 만들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 주소는 알지? 옆집으로 오면 되."

"응 알겠어."

"그럼 나중에 만나."

"잘가라."

""모두 좀 있다가 봐."

조금 있다가 벌어질 파티를 기대하며 고타로우는 셋과 헤어졌다. 타츠키와 타쿠는 집이 멀어서 히로시의 집에 잠시 있다가 오기로 했기 때문에 히로시의 리무진에 올라탔다. 히로시의 큰 리무진에 탄 타츠키와 타쿠가 벌일 작은 소동을 혼자 상상하며 고타로우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 때, 고타로우의 머리에 잠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 음식은?"

다카시가 갑자기 말한 파티라, 음식 준비를 전혀 생각하지 못해 버린 것이었다. 고타로우는 황당해서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지갑을 열어 보았지만 텅 비어 있었다. 고타로우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 잠시 걱정에 휩싸였다.

"아, 통장! ....... 거기다가 전화가......."

황당하기는, 그런 간단한 문제를........ 고타로우는 머리를 쥐어박으며 웃었다. 통장에 있는 돈으로 고기정도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외 반찬은 전화해서 구해 오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고타로우는 시계를 보았다. 4시 27분. 고기를 사고 전화까지 하기에는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타로우는 속도를 높였다.



"다녀왔습니다."

사 들고간 고기는 가방에 숨겨두고 고타로우는 다시 옆집으로 들어갔다. 그 때, 갑자기 검은 물체가 고타로우에게 달려들었다.

"야! 저 시노라는 애가 다니는 보육원이라고 하는 곳 애완동물도 들여보내냐?"

"에? 아, 네에......."

검은 물체가 뭐였는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지만 놀란 고타로우는 마치 사정하는 듯한 말투로 묻는 말에 얼떨결에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대답을 하고서야 검은 물체가 뭔지 알 수 있었다. 개였다. 고타로우의 대답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구석에 박혀 있는 그 개는 주위에 도깨비 불까지 보이는 듯 매우 불쌍해 보였다. 고타로우는 잠시동안 어떻게 개가 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상당히 정신이 혼미해졌다.

"오빠~~!"

또 다른 누군가가 고타로우를 향해 달려왔다. 시노였다. 그제서야 고타로우는 지금 자신이 잇는 이 집이 이 세상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집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눈 앞에 있는 개도 악마일 듯 싶었다.

"그래, 시노. 잘 다녀왓니?"

고타로우는 시노를 안으면서 말했다.

"응!"

"우냥, 다녀왔어?"

"다녀오셧어요?"

"어서와."

"......."

"다녀왔습니다."

고타로우는 다시 한번 인사하고 신발을 벗었다. 역시나 미샤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시노를 안고 있던 터라 고타로우는 꼼짝 없이 안길 수 밖에 없었다. 타로가 그 모습을 보더니 또 한마디 할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고타로우는 얼굴이 약간 붉어진 채로 시노를 내려놓았다.

"아, 저기 이......."

고타로우는 얼굴을 긁적이며 검은 개를 가리켰다. 타로가 놀리기 전에 화제를 돌리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 단순한 화제돌리기라기 보다는 갑자기 나타난 정체 모를 말하는 개에 대해서 궁금하다는 이유가 더 컸다. 고타로우가 궁금하다는 눈치를 보이자 그때까지 무슨 일인지 모를 충격으로 침울하다 못해 울고 잇던 그 검은 개가 갑자기 폼을 잡더니 입을 열었다.

"재방송은 싫으니 아까보다 짧게 말하지. 내 이름은 Solide.De.Flume. 리드라고 편하게 불러라. 마견신, 즉 악마의 일종이다. 그 외 궁금한 건 저기 있는 녀석들한테 물어봐."

아까의 침울해 보였던 것과는 반대로 말투는 상당히 멋있었다. 하지만, 꼬리를 흔드는 모습은 고타로우에게 웃음을 참게 만드는 고통을 주고 말았다. 그 외 궁금한 점은 별로 없었다. 꼬리를 흔드는 모습으로 보아 위험한 성격은 아니라는 확신만 있으면 고타로우에게 충분했다.

"말하는 강아지 넘 조아!"

"우와~ㄱ! 그만 끌어안아, 이 꼬맹이! 으악!"

갑자기 시노가 달려들어 안았다. 순간, 고타로우는 시노가 천사와 악마에 대해 어느정도 알아버린 게 아닐가 하는 걱정이 생겼다. 시노는 악마의 기운도 느낄 수 있어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생각났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시노도 다 컸잖아."

"미샤누나....... 그게 아니라......."

  미샤가 나름대로 무언가 생각을 읽은 듯이 말하긴 했지만 역시나.......

"상관없다. 그냥 말하는 개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니까. 악마의 기운도 이제 느끼지 못하게 된 것 같고. 그리고 말 할 줄 안다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저 멍청한 녀석이 사라질 거라고 말해놨으니 아마 입은 걱정 없을 거다. 인간 아이는 말을 잘 듣는 편이니까"

"너만 어렸을 때 말썽부린게 아니고?"

"입다물어."

일단 어느정도 안심이 되는 답변. 고타로우의 표정은 무시하고 또다시 둘은 싸우기 시작했다.

"이랴!"

"으~! 이 꼬맹이 녀석 여행 갔다가 왓다는 게 기운이 왜 이리 넘쳐! 보통은 쓰러져야 하는 거 아냐?"

"누구 피를 받았는데 그렇게 간단히 쓰러지겠냐."

"앞으로 힘드시겠어요. 리드씨."

고타로우는 점점 시끄러운 집안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싫다는 건 아니었다. 혹시 집 안이 많이 침체되어 있지 않을까 많이 걱정했던 참에 그런 분위기는 오히려 반가울 뿐이었다.

"....... 시노나 고타로우나 불쌍하지. 저 바보 피를 이어받았으니."

"야!"

"거기다가 말하는 거 간단하게 들켜버린 저 멍청이도 똑같은 놈이고."

"참지 못하고 꼭 유치하게 토를 다는 넌 뭔데?!!"

"딩동!"

또다시(이번에는 셋이 되어 더 시끄럽게) 말싸움을 벌일 판에 문에서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고타로우는 순간 움찔했다.

"저기 리드라고 했죠? 오늘 밤동안은 진짜 개인 척 해 주세요. 시노? 이 강아지 절대 말할 줄 안다는 거 얘기하면 안된다."

"응!"

"어이, 도대체 뭐냐? 감히 나보고......."

리드의 말이 끝나기 전에 고타로우는 문을 열었다. 말로 설명하는 것 보다 깜짝파티이니 만큼 눈으로 보여주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문이 열리자, 리드의 입이 막혔다. 문 앞에는 편한 옷차림으로 찾아온 고보시와 다카시가 서 있었다.

"고타로우, 조금 빨랐나?"

"아냐, 2~3분 정돈데 뭐."

다카시가 묻자 고타로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고보시가 커다란 검은 보따리를 고타로우에게 넘겼다.

"아까 부탁했던 음식 재료들. 후,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다카시가 준비한 것도 안에 있어."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아까 준비한 고기를 그대로 집에 두고 왔네."

"고타로우!"

복도 끝에서 누군가 고타로우를 불렀다. 타츠키와 타쿠, 히로시와 카오루였다. 히로시와 카오루는 다카시와 고보시와는 달리 약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멋진 옷을 입고 있었다. 히로시는 결혼할 준비라도 한 것처럼 검은 턱시도에 반짝이는 검은 구두, 거기다가 평소에 끼던 안경보다도 훨씬 고급인게 확실한 안경까지 쓰고 왔다. 카오루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목에서 가슴, 허리까지 엑스자 모양의 천이 가리고 등에는 아무것도 가려지지 않은, 그리고 치마부분은 걸을 때마다 묘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흔들림을 보여주는 붉은 옷을 입고 잇었다. 약간 이상한 점이 있다면, 집에 가지 못했을 듯한 타츠키와 타쿠도 고급정장을 입고 있었다는(집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가방도 메고 있었지만 하여튼) 거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히로시에게 빌렸거나 받았을 거였기 때문이었다.

"저기 저 두사람은......."

"아, 학교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이야."

"으응. 타츠키와 타쿠라는 사람들이구나."

고보시가 알겠다는 듯 끄덕이며 말했다. 전에 서로에 대해 말한 적이 잇어서 따로 설명을 필요 없을 듯 싶었다. 서로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파티 때 하면 되니까."

"히히, 히로시하고 카오루 멋있다고 칭찬해 주니까 이 옷 그냥 주었다~."

타츠키가 웃으면서 자랑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우냥! 고보시 키 많이 컸네!"

"아, 미샤언니 오랜만이에요."

"우오! 미샤씨. 언제봐도 눈부십니다."

"시노, 오랜만이야. 이번에도 머리장식 달아줄까?"

"응!"

모두들 각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고타로우는 다시 상황을 설명해 주기 위해 뒤돌아섰다. 타로는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라 아직도 놀란 듯 하더니 고타로우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알겠다는 듯 웃어보였다. 시로와 리드는 이게 무슨 바보같은 짓이냐는 창백한 표정으로 고타로우와 손님들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이상한 점은, 시아는 계속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약간 장난기 있는 미소. 설마.......

"마침 잘됐네요. 혹시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음식 재료를 준비해 두었는데."

예상외........ 항상 어벙해 보여서 미샤 다음으로 눈치채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계속 짓고 있던 미소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었다.

"에? 그럼 이건......."

"나도 고기 준비했는데......."

"괜찮아요. 남는 건 내일 도시락으로 싸 드릴게요."

"우와아 정말, 시아누나?

다카시가 좋아하며 외쳤다. 그 때, 리드가 고타로우에게 잠깐 와 보라고 했다.

"어이, 니가 고타로우 맞지?"

불량배같은 사나운 말투로 리드가 고타로우에게 물어보았다.

"네, 그런데요?"

"설마 불려온 첫날부터 인간들 앞에서 귀여운 강아지 흉내를 내라는 거냐?"

"어쩔 수 없다구요. 저도 덕택에 학원 빠지고 왔는 걸요."

"어쩔 수 없다 는 것 치고는 상당히 즐거워 보인다만?"

사실이었다. 학원 빠진 것도 파티도 생각한 건 다카시였지만 지금 무지 즐거운 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타로우는 할말을 잃고 멋쩍은 듯 웃으며 얼굴만 긁적였다.

"상관 없잖아. 아까는 셋 데리고 잘도 놀더니만. 그리고 언젠가 한번 있을 일이고."

"어이......."

"천성이 귀여운 강아지더구만."

이번에는 리드가 할 말이 없어진 듯 싶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고타로우가 학교에 있을 때 약점을 잡힌 게 분명했다. 리느는 안절부절 못하더니 결국 얼굴이 빨개지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힘없이 푹 숙여버렸다.

"쳇...... 알겠다구. 하면 돼잖아, 하면."

"죄송해요."

"모두들 들어와. 밖에 서 있지 말고 안에 들어와서 얘기하자구."

타로가 말하자 그제서야 밖에 있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다 들어오자 이 계략을 꾸민 다카시가 외쳤다.

"음, 음. 그럼 파티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

"예, 예."

아직 음식도 준비가 안 되긴 했지만 파티의 서막을 알리는 모두의 함성과 박수소리가 리드의 불만의 찬 소리를 덮어버리며 퍼져갔다.


"아, 저도 같이 할께요."

"괜찮아요."

"아니에요, 저도 하면서 시아언니에게 요리 좀 배울려구요. 헤헤......."

고보시가 혀를 살짝 내밀며 웃었다. 시아가 요리하는 것을 돕겠다고 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제에발. 사양하지 말아줘요."

"네, 그럼 부탁할게요."

"와아, 고마워요."

"야, 괜히 지난번 이상한 떡볶이 같은 거 만들지 말고 그냥 와라. 그 느글느글한게 아직도 속을 괴롭힌다고. 우욱, 입까지......."

"우....... 시끄러!"

따악! 약올리는 히로시에게 던진 숟가락이 히로시의 머리에 명중. 히로시는 머리를 감싸쥐고 괴로워했고, 고타로우와 다카시, 그리고 카오루는 배를 잡고 소리내어 웃었다. 히로시가 말한 떡볶이는 고보시의 최근 실패작이었다. 검게, 하지만 탄 것 같지는 않은 그런 수상한 떡볶이를 울먹울먹하는 고보시를 보고 위로하려는 생각으로 모양이 전부는 아니라며 모두들 동시에 한입씩 먹어버린 것이다. 뭐, 침 한번 꿀꺽 삼키고 용기를 낸 결과야....... 암담했다. 그 매운 맛에 이틀 동안 입에 들어가는 게 무슨 맛인지 느끼지 못했으니까.

"고보시 언니가 만든 떡볶이 시러......."

"시노....... 너마저......."

웃음소리는 금세 커졌지만, 모두가 알고있는 사정은 아니었기 때문에 웃고 있던 셋은 금방 웃음을 진정시켰다.

"괜찮을 거야. 시아누나가 봐 주고 있는데. 그건 그렇고, 모두들 그 동안 어디에서 뭐 하고 있던 거야?"

"맞아, 연락이 끊겨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고타로우는 찔금했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고타로우도 모르기는 했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곤란할 게 당연했긴 때문이었다. 솔직하게 마계에 갔다느니, 천계에 갔다느니 털어 놓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런 거짓말을 만들어낼 시간이.......

"음....... 그게 말이지, 나랑 시아가 사람의 도피를 했거든."

"네에?"

잠시, 고타로우는 하얘져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로와 리드는 또 이 바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걱정된다는 듯 얼굴이 창백해 져 있었다.

"드라마에 왜 많이 나오잖아. 시아 부모님이 영 허락을 않해서 말이지. 그래서 종적을 감춘 채로 가출~ 이란 거지. 결국 그러그러해서 저기 시로를 감시역으로 붙게 한다는 조건으로 약혼하고 돌아온 거야."

"우와!!!"

말이 되냐.......

안될 것도 없지....... 어딘지 이상해 보이는 이야기였지만 모두들 그런대로 그대로 믿는 눈치였다. 고타로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한단락 끝난 셈이었다.

"저기 그럼 미샤누나는?"

"응? 난 천계"

긴장이 풀리던 고타로우는 다시 굳어졌다. 모두들 긴장한 눈치였다. 미샤누나는 아무래도 조심했어야 했는데....... 예상치 못한 반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타로우의 머리가 급하게 돌아갈 때 쯤,

"하하, 안그래도 미샤누나는 엉뚱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으니까."

"맞아"

"헤헤"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걸까....... 따라웃는 미샤. 어쨌든 일단 무사히 넘어갈 희망이 생겼다. 고타로우외 악마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고보시가 채소를 끓는 물에 넣으며 물었다.

"그래두. 전화라도 하지. 시아누나는 사정이 그랬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해도......."

"거긴 전화기 없어."

잠시 침묵

"우체국 같은 것도?"

"응."

또다시 침묵

"외국으로 유학간 건가?"

"분쟁지역?"

"아무리 그래도 그런 곳으로 유학은......."

"아니, 타츠키....... 였던가? 어쨌든 미샤누나라면 가능해."

"에엣, 정말?"

"다카시님, 역시 날카로우셔~!"

"우오옷, 역시 미샤씨. 분쟁지역의 위험을 마다않고 천사의 손길을......."

모두들 나름대로의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고타로우는 관자놀이에 땀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어째서 모두들 이런 생각을.......

"아아, 그건 그렇고 이 두사람 소개해 줘야지, 고타로우."

위기모면 작전. 타로가 고타로우에게 제안했다. 좋은 생각이었다. 화제전환에 안그래도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네, 그렇네요. 왼쪽에 있는 사람은 타츠키, 오른쪽이 타쿠에요."

"어라? 이제껏 반대로 알고 있었네? 미안. 아, 난 다카시. 잘 부탁해."

"난 고보시야."

"잘 부탁해."

다카시와 고보시가 자기소개를 하자 타츠키와 타쿠가 같이 대답했다.

"전 시아라고 해요."

"응, 지난번에 고타로우가 가져온 도시락 누나가 만든 거죠?"

"엄청 맛있던데."

"아.... 아니..... 저기......."

타츠키와 타쿠의 칭찬의 시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응, 누구 며느리감인데. 난 타로야. 타로 형이라고 불러."

"네, 타로형. 행복하시겠어요."

"응! 당연하지!"

타쿠가 말하자 타로가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펴고 말했다. 그러자 고기를 볶고 있는 시아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

"어이! 그쪽 바도도 자기소개 해야지. 설마 내빼기냐?"

움찔, 타로가 멀찍이서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 시로와 리드를 향해 외치자 둘의 몸이 잠깐 움찔했다. 잠시, 고타로우의 귀에 왜 우리들을 불렀냐는 원망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시로라고 한다. 잘 부탁한다."

시로가 불만 가득찬 목소리로 퉁명스레 말했다. 바라보고 있는 타로의 얼굴을 살짝 보니 분명 즐기고 있었다. 그때,

"이 몸은......."

"퍼어억!!!"

.......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리드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폼 잡은 상태에서 자기 자랑을 하려 할 때, 시로가 리드의 머리를 땅에 박았다(우습지만 꼬리가 아직 살랑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아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시로는 틀림없이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응? 방금......."

"깨갱......."

카오루가 의문을 제기하려 하자, 그 말을 막으려는 듯 리드는 힘없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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